공지사항

 사사기(29)

왕이 없는 자들의 실체와 그들이 맺는 열매, 그리고 예수

 

(19:1~3, 27~30)

1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우거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더니

2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 아비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의 날을 보내매

3 그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히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하나와 나귀 두필을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비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비가 그를 보고 환영하니라

27 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 드러지고 그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28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이에 그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29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취하여 첩의 시체를 붙들어 그 마디를 찍어 열 두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30 그것을 보는 자가 다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날까지 이런 일은 행치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대학시절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보다 더 많이 불렀던 운동가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가사 내용이 비장하지요? 사랑도, 명예도, 이름까지도 남김없이 다 버리고 정의를 위해 이 한 목숨 바치겠으니 거기에 동의하는 산 자들은 모두 다 나를 따르라는 투사의 고백입니다. 저와 같은 386 세대치고 이 노래를 부르며 조국과 민족의 이름 앞에 눈물 한 번 흘려 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겁니다. 이 노래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이 한 몸 산화하여 바치겠다는 뜨거운 맹세들이 어느 새 사라지고 허울 좋은 깃발만 나부끼던 당시 학생 운동과 노동 운동 진영에 다시금 휘발유를 붓는 그런 노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배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젊은이들의 관심은 조국이니 민족이니 뭐 이런 것에 있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는커녕 어금니를 몽땅 뽑아서라도 군대에 가지 않으려는 이들, 인문서적이나 교양도서보다는 섹시한 춤을 추는 아이돌 그룹이나, 누가 더 바보인가를 경쟁하여 시청자를 웃기려고 하는 배우나 개그맨들에게 더 관심이 있는 이들. 여학생들에게 있어서 성형 수술은 교양 과목이 아닌 전공 필수 과목처럼 되어 버렸고, 명품 중독 현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회 전반의 보편적 성향이 되어 버렸습니다. 거기에 조국과 민족과 공리와 공의라는 단어들은 고리타분한 옛 시인의 허사처럼 들릴 뿐입니다.

그러한 이기주의적 경향과 개인주의적 방향성은 앞으로 더욱 뚜렷해질 것이고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그게 마땅히 멸망 받아 마땅한 모든 인류의 보편적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전에는 인간다워 보겠다는 최소한의 몸부림이라도 있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역사가 종말에 가까워질수록 인간들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는 그 정체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게 원래 인간들의 정체란다라고 누군가 인간의 실체를 발가벗겨 전시를 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이라도 심각하게 연구를 해 본 사람들은 이미 그러한 경향들이 말씀 속에 예견되어 있었음을 아실 겁니다. 그건 어떠한 경향 정도가 아니라 이미 결정이 난 아담 군상들의 실체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의 하나님 만들기 프로젝트에 돌입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들의 눈과 마음에 조국과 민족의 공익이라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짐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끊임없는 인간 자존심 챙기기 작업의 일환으로 라는 존재가 속해있는 국가와 민족의 공익과 평등을 외치고 있던 것뿐입니다. 이제는 그마저도 시들해졌지만요.

잘 생각해 보세요. 자신이 타도하겠다고 나선 불평등의 권력 속에 자기에게 유익이 될 만한 요소가 개입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배를 바꿔 타는 것이 인간입니다. 예를 들어 자기 아들이 출세를 하여 입법기관의 수장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이 그 입법기관에서 제정한 법을 두고 악법이니 뭐니 하면서 호들갑을 떨까요? 자기 아버지가 천신만고 끝에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에 입성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정부의 정책에 대해 불만을 가질 리가 있겠습니까? 돈에 치어 죽을 만큼 부자인 재벌이 인류의 평등 운운하는 거 보셨어요? 인간들의 보편적 양심이나 도덕, 윤리 지향성 등은 100% 자기 자존심 챙기기에서 격발되어 자기 영광 챙기기로 수렴이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법이라는 것 또한 인간이 자기 정당함을 주장하는 데에 동원한 변명이요 합리화일 뿐입니다.

 

따라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산화하여 조국과 민족의 공익과 평등을 위해 나갈 테니 산 자여 따르라고 외치는 그 사람이나 자신의 오락과 재미와 쾌락만을 위해 온 신경의 촉각을 그리로 향하고 있는 현대의 보편적 젊음은 모두 다 공히 자신의 자존심과 영광을 위해, 자신의 욕망 채우기를 위해, 극한의 이기와 개인주의로 일로매진하고 있는 아담 군상들의 다른 모습 같은 그림일 뿐입니다.

아닌 것 같으세요? 생각해 보자고요. ‘산 자여 따르라고 외친 그 사람이 군중을 어디로 끌고 가고 싶어 합니까? 모든 인류가 다 평등하게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는 유토피아로 그들을 이끌고 가고 싶어 합니다. 그 길은 반드시 투쟁이라는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으므로 자기가 먼저 그 투쟁의 선봉에 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함께 싸워서 유토피아를 함께 쟁취하자는 겁니다. 결국 투쟁의 목적이 뭡니까? 인간입니다. 그 중에서도 입니다. ‘가 속해 있는 공동체, ‘가 속해 있는 국가, ‘가 속해 있는 민족, 그러나 진짜 관심은 입니다. 그런 면에서 제가 성도의 입장에서 그 노래를 볼 때 그 노래가 웅변하고 있는 내용은 가증스러운 인간 군상들의 자기 영광 챙기기의 선동으로밖에 안 보입니다.

 

그런데 저도 그 노래를 자주 부릅니다. 물론 다른 의미로요. 간혹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가르치는 자리가 힘에 부친다는 생각이 들 때나, 아무도 따라오는 사람이 없이 나 홀로 그 길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습관처럼 이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어디로? 자기부인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로. 자유니 평등이니 주권이니 이런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이지요? 죽음의 자리로 가자는 것입니다. 어차피 그 길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이 세상의 사랑과 명예와 이름은 남김없이 부수어 가실 것이므로 그건 우리의 처리할 몫이 아닙니다. 그냥 먼저 그 길을 가신 예수를 의지하여 우리가 끌려갈 목표지점을 향해 방향을 돌리자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그렇게 가 볼 테니 힘 빠지지 말고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 자들만이 그 길을 따라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보세요. 세상의 의와 하나님 나라의 의는 이렇게 다릅니다. 세상의 의는 인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에 하나님 나라의 의는 하나님의 약속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는 하나님만이 의로우시다에 강세가 있지만 인간의 의는 인간도 위대하다에 강세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법과 도덕과 윤리 등을 근거로 하여 인간들 스스로가 선과 악을 판단하여 자기들끼리 해결책을 마련하여 치리를 한다거나 대책을 마련하는 등의 모든 행위들을 그들이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지적을 합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인간들이 스스로 왕이 되고 싶어서 하나님이라는 왕의 통치를 거부하는 패역함이 인간들의 왕 놀이라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전편에 걸쳐서 그러한 인간들의 왕 놀이를 깨부수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의를 드러내고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에게는 왜 하나님이라는 왕의 통치가 필요한가?’를 주지시키는 책이 사사기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왕 예수의 모형으로 다윗 왕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사기 전체에서 지적된 타락한 인간들의 실체, 그들의 보편적 경향과 지향성,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만들어내게 되는 결과물이 아주 적나라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법 지킴과 맹세와 절기와 의식 등으로 위장된 그들의 마귀적 실체가 아주 낱낱이 폭로가 됩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왕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스라엘, 즉 성도에게는 하나님이라는 왕의 통치가 필요한 것이다를 결론으로 제시하기 위해 사사기의 맨 마지막을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로 마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사기의 마지막 최종 결론 부분에서 인간들의 실체가 어떻게 폭로가 되는지 지금부터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대략 요약해서 설명을 해 드리면 이러합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19:1)’ 첩을 찾아 나서는 한 레위인이 등장을 합니다. 레위인이 첩을 하나 두었는데 그 첩이 바람이 나서 행음을 하다가 친정으로 도망을 간 것입니다. 레위인이 그 첩의 친정으로 가서 첩을 데려 오려 했습니다. 그런데 장인이 자꾸 못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며칠을 장인과 함께 보내다가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내를 데리고 떠납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어 베냐민 지파의 땅인 기브아에 가서 유숙을 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한 노인을 만나 그 집에 들어가 유숙을 하게 되는데 그 동네 비류들이 문을 두드리면서 말하기를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 (19:22)’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그 모습이 기브아에 그대로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그 집주인이 그 레위인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딸을 그 비류들에게 내어줍니다. 그리고 그 레위인의 첩도 레위인 대용으로 비류들에게 붙여집니다. 밤새 시달림을 당한 그 레위인의 첩이 결국 그 기브아에서 죽습니다. 그러한 일을 당한 레위인이 분이 났겠지요? 레위인은 마치 제물의 각을 뜨듯 자기 첩의 몸을 열두 토막으로 나누어 각 지파로 보냅니다. 베냐민 지파의 악을 이스라엘 온 지파에게 다 알리겠다는 심사였습니다.

 

여기까지가 19장까지의 개괄적 내용입니다. 도대체 사사기의 마지막 결론이 왜 다른 부족과의 싸움도 아니고 이스라엘 내의 자중지란으로 이렇게 끝이 나게 되는 것일까요? 성경은 지금 하나님께서 사사로 모형 되고 있는 메시아를 보내어 그들을 구원해 낼 수밖에 없는 이유,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 되셔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주인공은 이스라엘도 아니고 사사들도 아닙니다. 사사기의 주인공은 바로 이스라엘의 머리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잘 보세요. 이스라엘에 하나님이라는 왕이 없으니까 치안이 어떻습니까? 깡패, 즉 힘 가진 자가 법입니다.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이 세상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베냐민 지파의 땅입니다. 거기에 법도 없고 예의도 없는 깡패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등장 이유는 더욱 가관입니다. 남자들이 남자를 상관하겠다고 자기 마을 노인의 집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민족이고 국가고 다 필요 없습니다. 자신들의 유익과 쾌락 앞에서 민족까지도, 그가 제사장 지파인 레위인이라 할지라도 상관없습니다. 상대방을 죽여 나의 쾌락을 채우겠다는 심산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게 바로 이스라엘의 정체였음을 작은 예를 통해 암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그러한 이기심은 나그네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서도 드러납니다. 레위인이 그 첩과 종들과 함께 기브아 성읍 거리에 앉았는데 아무도 그들을 영접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나그네를 그렇게 대접하면 안 되는 민족입니다.

 

(10:19)

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이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인사도 만질루나 만질루쿰’(우리 집이 곧 당신의 집이니 제 집처럼 생각하시오) ‘아흐란 와 싸흐란(제 집처럼 여기시오 내가 모든 편의를 제공하리이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사만 그렇게 했지 나그네를 전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의 실체였습니다.

그때 기대치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레위인과는 아무 상관없는 노인이 그 일면식도 없었던 레위인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게다가 레위인의 몸을 요구하는 비류들로부터 그를 살리겠다고 자기 자식을 비류들에게 내어주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하나님이 보내신 두 천사가 소돔을 멸하기 위해 롯의 집에 들렀을 때 소돔의 비류들이 두 남자를 내 놓으라고 롯의 집 대문을 두드리지요? 그때 롯도 자기의 딸들을 내어 놓습니다. 성경이 지금 소돔의 이야기를 그대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이스라엘의 대표로 등장하고 있는 베냐민 지파가 소돔처럼 멸해져야 마땅한 자들임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 노인을 베냐민 사람이 아닌 다른 곳 사람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19:16)

16 이미 저물매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니 그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우거하는 자요 그곳 사람들은 베냐민 사람이더라

 

그 노인은 지금 인간 죄악의 표본으로 모형 되고 있는 베냐민 사람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온 어떤 이가 레위인(왕 같은 제사장)을 살리기 위해 자기 자식을 마귀들에게 내어주는 모습입니다. 왕이 없는 고로 자신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마귀 짓을 하고 있는 베냐민(이스라엘 전체의 대표)지파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람이 베냐민 지파의 대척점에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그 노인의 지혜로 죽어야 할 레위인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첩이 죽었잖아요? 원래는 그 죽음의 자리가 레위인의 자리였다는 말입니다. 죽어야 할 어떤 이 대신에 제물이 되어 죽임을 당하는 사람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26절을 보시면 그 여인이 죽지 않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9:26)

26 동틀 때에 여인이 그 주인의 우거한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누웠더라

 

그 레위인의 첩이 마귀 같은 베냐민 비류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제 발로 그 노인의 집까지 걸어 왔습니다. 그리고는 대문 앞에 쓰러져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레위인이 자기 대신 끌려간 그 여인이 조금이라도 걱정이 되었다면 한 번쯤 문을 열어 보았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그 여인은 죽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매정한 레위인이 그렇게 비류들에게 당하고 온 자기 첩을 그냥 문 밖에 놔두고 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혼자 떠나려고 합니다.

 

(19:27~28)

27 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지고 그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28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이에 그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여러분, 베냐민 지파 비류들이 마귀가 아니라 이 레위인이 진짜 마귀처럼 보이지 않으세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요?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것이, 그럴 거면 왜 레위인이 애초에 행음까지 한 그 여인을 찾아 나섰냐는 것이지요. 에브라임 산지에서 유다 베들레헴에까지 행차를 하셨잖아요? 뭔가 석연치가 않지요? 지금까지 성경 표피에 나타난 내용을 훑어보았다면 이제 그 아래에 숨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찾아보겠습니다.

 

왕이 없는 이스라엘에 레위인 한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그 레위인이 어디로 향합니까? 유다 베들레헴으로 향합니다. 누구를 찾으러? 자기를 버리고 행음하다가 도망간 아내를 찾으러 가는 것입니다. 미가서에 보면 왕이 없는 유다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하늘의 대 제사장에 관한 내용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5:2)

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왕이 없어 세상과 행음하고 있는 당신의 신부를 찾아 당신의 통치 속으로 품어 안기 위해 유다 베들레헴으로 오시는 하늘의 왕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본문 18절을 보시면 레위인이 자신의 첩을 데리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이렇게 밝힙니다.

 

(19:18)

18 그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가나이다 나는그 곳 사람으로서 유다 베들레헴에 갔다가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

 

행음한 첩을 찾아서 여호와의 집으로 데리고 올라가는 중이라고 하지요? 2,000년 전 예수님께서 행음한 신부를 찾아 유다 베들레헴으로 오셨습니다. 그 하늘의 대 제사장은 우리의 목숨 값으로 당신의 목숨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품에 품어 안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여호와의 집으로 끌어당기신 것입니다.

이 역사는 이미 완료가 된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눈에 보이는 가시적 형상으로 재연하는 무대입니다. 그래서 이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바라보면 완료가 아니라 진행형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 즉 시간은 순서와 차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라는 시간과 공간을 통과하는 성도들은 지금 자신을 구원해서 여호와의 집으로 향하고 있는 신랑의 손에 붙들려 있는 중인 것입니다.

 

그런데 비류들이 신부를 품어 안고 여호와의 집으로 향하고 있는 레위인을 욕보이려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서 비류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어구가 벨리알 벤’, 벨리알의 자손들이라는 어구입니다. 벨리알은 여러분이 익히 아시는 것처럼 음부, 사망, 지옥, 마귀,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자, 불량하고 악한 자 등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13:13, 15:9, 삼상2:12, 삼하22:5) 오죽하면 사도 바울도 그 단어를 인용해서 어두움의 세력, 마귀의 세력을 지칭했습니다.

 

(고후6:15)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바로 여기에 나오는 벨리알이라는 단어가 비류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사기의 형국이 하늘의 대 제사장이신 예수를 모형하고 있는 레위인을 벨리알이 욕보이려 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 전에는 신부의 아비가 레위인을 붙들어 두고 자기 딸을 여호와의 집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시험을 합니다. 매일같이 진수성천을 차려 놓고 술과 음식으로 레위인을 붙들어 두려 합니다. 마치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던 마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으세요? 원래 이 역사 속에서의 우리의 아비는 누구였습니까?

 

(8:44)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우리는 모두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 말은 우리의 본질 자체가 마귀 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신랑이 내려오셔서 그 마귀를 묶고 마귀의 세간에 불과했던 그의 신부를 늑탈해 내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3:26~27)

26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

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그렇게 해서 승부는 이미 났고 마귀는 지금 이 역사 속으로 추방이 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 용이 이 역사 속에서 신랑의 사랑을 받아 자기의 품에서 신랑의 품으로 옮겨진 여자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걸 허락하십니다.

 

(11:1~2)

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보세요. 구원 받은 하나님 백성들, 거룩한 성의 핍박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레위인이 그렇게 매정한 사람처럼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 첩을 죽이라고 내 준 사람처럼 나 몰라라 하고 문을 잠가 버린 것입니다. 그랬더니 정말 벨리알들이 그 여자를 죽여 버렸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11:7-9)

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하나님의 백성이 소돔에서, 예수가 죽임을 당한 곳에서 예수와 똑같은 죽음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을 보세요.

 

(19:25)

25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무리에게로 붙들어 내매 그들이 그에게 행음하여 밤새도록 욕보이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자기 첩을 벨리알들에게 내어준 이가 누구입니까? 자기 첩을 여호와의 집으로 데리고 가고 있는 중인 레위인입니다. 성경은 마귀에게 넘겨져서 죽어야 할 레위인 대신에 자신의 딸을 내어 주는 노인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의 대속 사역을 언뜻 힌트를 한 후에 그렇게 살아난 자들의 이 세상 속에서의 삶이 어떠한 국면으로 펼쳐지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레위인에 의해 용서를 받고 여호와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신부의 역사 속 현실을 모형화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랑에 의해 용서받고 구원받은 하늘의 신부들이 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살게 될 것인가가 이 에피소드의 중심 메시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제 추론이 아닙니다. 계속 이어지는 20장과 21장을 보면 왜 성경이 여기에서 열 두 토막으로 찢기는 여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지가 분명하게 나옵니다. 그 여자의 죽음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죄인으로 폭로가 되고 그들 전체가 멸망의 위기로 몰리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 은혜가 가입하여 대 반전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왜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부들을 이 역사 속에서 마귀들에게 내어주시어 소돔에서 죽게 만드신다고 하지요? 이 세상이 얼마나 패역한 곳인지, 그 곳을 채우고 있는 인간들이 얼마나 불가능하고 추악하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온 세상에게 맞아 죽으심으로 온 세상이 유죄로 판명이 난 것처럼 그 예수에 의해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 또한 이 세상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 그들에게 맞아 죽는 역할을 부여 받게 되는 것입니다.

 

(19:1~2)

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이 세상이 어떻게 심판대로 향하게 됩니까? 하나님의 종들의 피를 흘리게 한 대가로 심판을 받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만이 유일할 구원의 길이라는 복음을 멸시하고 그렇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이들을 루저(loser)로 정죄하며 섬김의 삶을 실천하려 하는 이들을 오히려 짓밟아 뭉개는 이 세상의 악한 행사가 하나하나 다 하나님의 수첩에 기록이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심판대 앞에서 그것을 확 펼치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왜 우리가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라고 대드는 그들에게 심판의 근거로 들이 대실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를 전하는 자들과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왜 멸시하고 천대합니까? 인간들의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서입니다. ‘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된 우리가 예수만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냐? 그럼 우린 뭐냐?’하며 예수와 복음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에게 맞아죽는 성도와 복음을 예수의 죽음과 방불한 것으로 표현을 하시는 것입니다.

 

(15:18~20)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5:11)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그렇지요? 예수에 의해 건짐을 받은 예수의 신부들은 이 역사 속에서 예수와 똑같이 세상에게 맞아 죽어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예수 때문에. 어떠세요? 예수는 우리 때문에 죽으시고 우리는 예수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레위인이 행음한 첩을 용서하고 여호와의 집으로 데리고 올라가는 것은 하늘의 레위인이 그 행음한 첩 대신에 십자가에 매달려 죄 값을 다 치른 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원을 얻은 행음한 첩이 벨리알에게 강간당해 소돔에서 죽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자신을 용서하고 구원한 남편 때문에.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생기게 놔두신다고요? 세상의 죄악을 폭로하고 고발하기 위해서요. 레위인이 그 여자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합니까? 열 두 토막을 내서 각 지파로 보냅니다. 성경은 그 레위인의 행사를 이스라엘의 음행과 망령됨을 폭로하기 위해서라고 밝힙니다.

 

(20:6)

6 내가 내 첩의 시체를 취하여 쪼개어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내었노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을 인함이로라

 

그런데 사실 베냐민 지파의 그러한 추악한 모습은 이스라엘 전체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에게 레위인의 신부의 시체를 토막 내어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왕 삼아 살지 않는 이스라엘의 실체가 어떠한 것인지를 폭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셔서 쪼개지심으로 말미암아 세상 전체가 유죄 선고를 받은 것처럼 이 레위인의 신부가 제물이 되어 이스라엘 전체에 유죄 선고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19:29-30)

29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취하여 첩의 시체를 붙들어 그 마디를 찍어 열 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30 그것을 보는 자가 다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날까지 이런 일은 행치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 하였도다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레위인은 제물을 잡고 제물의 각을 떠서 하나님께 바치는 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지금 레위인이 자기 신부를 그렇게 각을 뜨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1절에서 교회에게 이야기하기를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지요? 바로 그 모습인 것입니다. 레위인의 신부가 제물로 각이 뜨여 각 지파에게 전해지자 그 이스라엘 전체의 실상이 확 드러납니다. 30절을 보시면 그 각이 뜨여진 제물을 보자마자 이스라엘의 각 지파가 한 목소리로 내가 이런 악한 일은 행치도 아니했을 뿐더러 보지도 못했다고 자기 평가를 내립니다. 난 적어도 이런 일을 저지른 베냐민 지파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너희들의 실체를 똑바로 보라고 제물을 잘라서 각 지파에 보내셨는데 각 지파는 오히려 선악을 판별하는 심판자로 나서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멸해 버리시겠다고 하시는 세상의 교만인 것입니다.

그 일로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총회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모인 사람이 칼을 빼는 보병만 사십만 명이었습니다. 사사기 전체를 통 털어 가장 많은 군사가 모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모였다고요? 악인을 징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리고는 총회가 의결을 하기를 베냐민을 쳐서 일벌백계를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20:10~13)

10 우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백에 열, 천에 백, 만에 천을 취하고 그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예비하고 그들로 베냐민의 기브아에 가서 그 무리의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하니라

11 이와 같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하나 같이 합심하여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더라

12 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들을 보내어 두루 행하며 이르기를 너희 중에서 생긴 이 악이 어찜이뇨

13 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 곧 그 비류를 우리에게 붙여서 우리로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하여 버리게 하라

 

지금 사사기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라는 반복 어구를 통하여 이스라엘 전체의 죄를 지적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각 지파가 베냐민 지파에 왕이 없으므로 저들이 저렇게 악하게 되었다로 몰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 지파를 악의 축으로 몰아 자기들의 선함을 상대적으로 챙겨 가지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 베냐민에게 징벌을 내리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먼저 나설 테니 산 자여 따르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악당의 표본으로 등장하는 베냐민 지파에게 이스라엘 나머지 지파들을 붙여 버리십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악당에게 붙여지는 하나님의 신부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부정이 됩니다. 악당이 오히려 이기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와중에도 십자가를 또 한 번 보여주십니다.

 

(20:17~18)

17 베냐민 자손 외에 이스라엘 사람의 칼을 빼는 자의 수는 사십 만 명이니 다 전사라

18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먼저 일지니라

 

이 사사기의 맨 처음이 어떻게 시작하지요? 유다 지파가 가나안 정복 전쟁의 선봉에 서서 전쟁을 치름으로 시므온 지파를 비롯한 다른 지파들이 유다 지파의 전쟁으로 살아나는 그런 그림으로 시작이 되지요? 사사기의 마지막에 역시 유다 지파의 선봉 전쟁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가 베냐민 지파에게 철저하게 도륙을 당합니다. 지금 성경은 유다 지파의 패배를 통하여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힌트하고 있는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베냐민과 함께 모두 죽어야 할 이스라엘이 살아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요소요소에 십자가를 감추어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폭로해 갑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여자 하나가 죽었습니다. 그 일로 이스라엘 총회가 모였습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이 무엇입니까? 그 여자를 죽인 베냐민 지파를 벌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왜요? 베냐민 지파 하나에 비해 나머지 열 한 지파의 연합된 힘은 막강한 것이었으니까요. 강함으로 약함을 눌러 버리겠다는 힘의 원리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의 선악 판단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습니까? 첫 번째 전쟁에서 22천명이 죽고 두 번째 전쟁에서 18천 명이 죽습니다. 세 번째 전쟁에서는 251백 명이 죽습니다. 보세요. 인간들이 자신들의 선악 판단에 의해 내린 결정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습니까? 공멸입니다. 다 죽는 것입니다. 하나 죽은 걸 해결하려다가 모두가 공멸될 위기에 봉착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를 부으셔서 악의 축 역할을 맡은 베냐민 지파를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직접 심판을 하십니다. 그건 인간들아 세상의 심판권은 너희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걸 확인시켜 주신 것이었습니다.

 

(20:35)

35 여호와께서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쳐서 파하게 하시매 당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 일백을 죽였으니 다 칼을 빼는 자 이었더라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 군상들의 자기 힘자랑을 이렇게 부수어 버리십니다. 그게 바로 힘으로 여자를 강간하여 죽여 버린 베냐민의 모습이었음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베냐민도 나머지 열 한 지파도 똑같이 자기의 힘을 의지해서 다른 이 위에 군림하려는 마귀적 본성을 고발당한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벨리알이었던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의 기도가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보세요.

 

(20:18)

18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먼저일 지니라

 

베냐민 지파는 벌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니 그들과는 다른, 자격 있는 자기들이 치리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누가 올라갈까요?’ 이건 베냐민 지파가 징벌을 받아야 한다는 당위성이 전제가 된 것입니다. 자기들이 자기들의 선악구조에 의해 판단을 내린 뒤 하나님을 조력자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가서 대패를 하고 옵니다. 그 뒤 기도가 어떻게 바뀌나요?

 

(20:23)

23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서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나의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한 풀 꺾였지요? 두 번째 기도에서는 나의 형제 베냐민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싸우겠습니다.’가 아니라 싸워도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나가서 또 집니다. 40만 명이 27천 명한테 번번이 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에는 이스라엘의 기가 완전히 꺾입니다. 그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변하는지 보세요.

 

(20:26~28)

26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서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고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27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28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셨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묻자오되 내가 다시 나가 나의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이스라엘이 드디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며 금식하며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는 다시 묻습니다. ‘싸우는 게 맞습니까? 틀립니까? 싸울까요? 말까요?’ 판단의 주권을 하나님께로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렇게 자기부인의 과정으로 몰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악인이 더욱 선명하게 악으로 드러날 수 있고, 또 그러한 모습 속에서 내가 바로 악당이요 죄인 중의 괴수로구나하는 자각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항복을 하고 들어오는 백성들 앞에서 원수를 물리치심으로 모든 목적을 달성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사사기 전체의 내용이었잖아요?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한 지파, 베냐민 지파가 씨가 마릅니다. 남자 육백 명만 겨우 살아서 광야로 도망갑니다. 그들의 성읍은 모두 불탔고 가축과 여자들까지 다 죽었습니다. 이게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 자리를 이탈한 아담 속 인간들의 선악판단이 맺는 역사의 결론인 것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창조가 불완전으로 끝이 나 버린 것입니다. 열둘이 열 하나가 되었습니다. ‘누가 높은 자리에 앉겠습니까?’를 물으며 높은 자리 경쟁을 하던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열한 명으로 끝나는 모습과 동일한 모습인 것입니다. 그걸 하나님의 은혜로 열둘로 만들어 완성시키시는 것을 구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21장에서는 다시 한 번 인간들의 불가능함이 낱낱이 까발려 집니다. 열한 지파로 줄어든 자기들의 모습을 보며 이스라엘이 안타까워합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의 힘으로 그 열하나를 열둘로 채워보려 합니다. 여전히 자기들이 법이 되어 자기들의 지혜와 판단으로 완성의 자리를 추구합니다. 남아있는 베냐민 지파 남자들에게 여자를 구해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으로 내 놓은 것이 공격할 구실을 찾아내어 거기에서 여자를 빼앗아오는 것이었습니다.

 

(21:5, 8-12)

5 이스라엘 자손이 가로되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와 함께 하여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뇨 하니 이는 그들이 크게 맹세하기를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하였음이라

8 또 가로되 이스라엘 지파 중 미스바에 올라와서 여호와께 이르지 아니한 자가 누구뇨 하고 본즉 야베스 길르앗에서는 한 사람도 진에 이르러 총회에 참예치 아니하였으니

9 백성을 계수할 때에 야베스 길르앗 거민이 하나도 거기 없음을 보았음이라

10 회중이 큰 용사 일만 이천을 그리로 보내며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가서 야베스 길르앗 거민과 및 부녀와 어린 아이를 칼날로 치라

11 너희의 행할 일은 모든 남자와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할 것이니라 하였더니

12 그들이 야베스 길르앗 거민 중에서 젊은 처녀 사백 인을 얻었으니 이는 아직 남자와 자지 아니하여서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라 그들이 실로 진으로 끌어 오니라 이는 가나안 땅이더라

 

베냐민을 치기 위해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총회로 모였을 때 안 올라온 사람들을 색출해 내어 그들을 다 죽이고 처녀만 살려내어서 베냐민 지파의 대를 잇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자격으로, 무슨 근거로요? 총회 때 그렇게 결의했으니까요. 자기들의 내린 결정과 판단을 고스란히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판단은 옳은 것이며 가치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스라엘의 행사 뒤에 성경이 붙이는 말이 있지요? ‘이는 가나안 땅이더라무슨 말입니까? 가나안 땅은 은혜로 들어간 땅이고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땅인데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힘을 자랑하고 축적하는 땅으로 변개시켜 살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200명 정도의 여자가 모자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불완전입니다. 그러면 자기들 지파에서 처녀 몇 명씩 갹출을 해서 그 빈자리를 메워주면 되잖아요? 왜 그건 안 하지요? 이미 죄를 지은 지파로 낙인이 찍혀 버린 베냐민 지파에게 자기 지파의 딸들을 보내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손해가 되고 흠이 되는 일은 절대 안하겠다는 것입니다. 19, 2021장이 전부 이 이야기잖아요? 그래놓고는 이렇게 핑계를 댑니다.

 

(21:1)

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21:6~7)

6 이스라엘 자손이 그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가로되 오늘날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쳤도다

7 그 남은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게 하리요 우리가 전에 여호와로 맹세하여 우리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아니 하리라 하였도다

 

(21:18)

18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못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였음이로다

 

자신들이 한 맹세 때문에 베냐민 지파에게 딸을 못 준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자신들의 경건을 지키기 위해, 맹세를 지키기 위해,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하겠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기들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것이지요. 순 사기입니다. 인간들은 이렇게 자기들의 정당함을 주장하기 위해 법을 동원하는 짐승들입니다. 도덕과 윤리 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이 생산해 낸 모든 것은 다 인간 자신들의 유익과 정당함을 수호하고 보전하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인간들의 열심과 노력과 수고와 지혜는 결국 불완전으로 끝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온전함을 요구하십니다. ‘내가 온전한 것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불완전을 완전으로 채우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개입을 하셔서 이스라엘을 온전케 하시는 것입니다.

 

(10:1,14)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보시는 것처럼 구약, 즉 제사와 율법으로는, 인간의 행위로는 절대로 온전케 될 수가 없습니다. 오직 무엇으로만 온전케 된다고요? 한 제물, 즉 예수에 의해서만 온전케 될 수 있습니다.

 

(12:23)

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여기에서 온전케 된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테텔레이오메논텔레이오의 수동태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온전해진 무리가 아니라 밖의 힘에 의해 온전하게 된 무리라는 것입니다. 역시 구약이 부정되고 십자가의 은혜만이 인정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금 사사기의 결론을 통하여 왜 인간이 스스로의 인생과 역사의 왕이 될 수 없는가(구약)를 열두 토막 살인사건과 이스라엘의 자중지란, 그리고 엉터리 중매의 모습을 통해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구약, 율법주의의 실패를 선언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마지막까지 자기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합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쓴 방법이 실로에 가서 여자를 보쌈 해다가 나머지 200명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입니다.

 

(21:19~21)

19 또 가로되 보라 벧엘 북편, 르보나 남편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길 동편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절기가 있도다 하고

20 베냐민 자손에게 명하여 가로되 가서 포도원에 숨어

21 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무도하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그 아내로 붙들어 가지고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

 

보세요. 이렇게 이스라엘은 끝까지 엉터리 해결책을 내어 놓으며 자신들의 마귀성을 폭로당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 이면에서 당신의 일을 수행해 내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보쌈이라는 얼토당토 한 계책을 내어 놓고 베냐민 지파는 그 계책을 실행으로 옮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다시 열둘이 되어 각자의 땅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실로라는 지명과 춤추는 자라는 단어입니다. 실로는 여호와의 집이 있는 곳이지요? 그곳은 제사장들이 거하는 곳입니다. 여기에서 춤추는 자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이사야서에서 구로하는 자라고 번역이 된 이라는 단어입니다.(13:8,23:4,2:17,45:10,66:8) 잉태치 못하고 구로치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구로하는 여자들이 주어지게 되는데 거기가 실로입니다. 하늘의 대 제사장이 계신 곳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스라엘은 완전히 마귀로 폭로가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들을 완성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비로소 베냐민이, 아니 베냐민으로 대표된 이스라엘이 잉태하는 자가 되어 산 자로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 속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로 불가능을 선고 받지만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의 또 다른 그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반드시 그들의 왕이 되어 그들 안의 아담들 죽여 내고야 말 것이다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기 다음 룻기에서 다윗 왕의 이름이 등장을 하고 사무엘 상하에서 사울과 다윗으로 율법과 은혜를 극명하게 대조한 후 다윗의 아들 솔로몬으로 예수의 모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들의 법이나 도덕이나 윤리, 맹세 등은 전부 자신들의 유익과 정당함을 챙기기 위해 동원한 변명이나 합리화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건 자기의 욕정을 채우기 위해 첩을 둔 레위인이나, 자신의 쾌락을 위해 동족인 남자까지도 겁간을 하려한 베냐민의 비류들이나, 남의 첩을 윤간하여 죽게 만든 그런 자들이나, 다 똑같은 경향과 지향성에서 격발이 된 것으로 사망을 유발해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율법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법이라고 하는 것이고 율법의 직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분이라 부른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켜내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붙드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마귀의 손에 한시적으로 붙여 놓으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철장에 맞아 죽어가고, 마귀의 공격에 죽어가고, 그렇게 열심히 죽다가 결국 하늘의 존재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안의 가짜 왕이 역사 속에서 죽고 진짜 하늘의 왕이 그를 통치하게 되는 자기 부인의 과정,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게 사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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