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로마서(7)

죽기 위해 태어난 다윗 왕의 혈통

 

(1:3~7)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오늘은 3절을 중심으로 왜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는가에 대해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먼저 숙지해 두셔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님의 출생이 다윗 왕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의 이해를 예수님은 귀한 분이시고 하늘의 왕이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계신데 그건 좀 가난한 이해입니다. 성경은 분명 하늘의 존재들을 설명할 때 혈통이나 육정의 개입을 불허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출생에 혈통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는 것은 그 혈통의 무용함과 무익함을 보여주는 것이지 그 혈통의 우수성과 그 혈통에서 난 이의 특별함을 설명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 육신으로는이라는 말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육신은 죽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따라서 예수님의 다윗왕가 혈통은 죽어야 할 인간 세상의 왕 됨의 추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윗 왕가의 혈통인 예수는 죽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하늘 왕자가 성령에 의해 사는 것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3절과 4절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 왕의 혈통은 예수 안에서 죽어야 할 이 땅의 역사와 죄인 것이고 성령에 의해 살아나는 하나님의 아들은 하늘의 왕과 하늘 백성을 품어 안은 하늘의 묵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거기에 대해 함께 고민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미국의 과학 저널리스트인 마틴 가드너의 백 만인의 상대성 이론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자연의 비밀은 어둠 속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다,

뉴턴이여, 일어나라”,

자연의 비밀은 모두 밝혀졌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악마가 소리쳤다,

아인슈타인아, 일어나라”,

자연의 비밀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것은 뉴턴에 의해 정리되었던 자연의 비밀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해 무참하게 부수어졌고 자연의 비밀은 다시 오리무중으로 돌아갔다는 비아냥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나타나기 전, 뉴턴의 물리역학 이론은 인과론적이며 결정론적인 것이어서 사람들이 자연의 비밀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아주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항상 원인이 있고 그 원인에 근거하여 결과가 발생한다는 그의 논리는 결과를 추적하여 원인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순리의 이해였습니다. 거기에는 질서정연돌발사태 불가라는 확고한 법칙이 함의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라는 젊은이가 나타나서 상대성 이론이라는 것을 내 놓음으로 해서 뉴턴의 인과론과 결정론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눈에 보이는 것이 관측자의 운동 속도에 따라 다르게 감지가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그 자체로 절대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수상대론의 내용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운동은 상대적인 것이다,” <운동의 상대설>

빛의 속도는 모든 관측자에게 일정하게 측정 된다,” <광속도의 불변 설>

움직이는 물체는 운동 방향으로 줄어든다,” <물체의 수축설>

움직이는 물체의 시간은 느려진다,” <시간의 지연 설>

움직이는 물체의 질량은 많아진다,” <질량의 증가 설>

광속보다 빠른 물체는 존재할 수 없다,” <광속의 극한 설>

그리고 실제로 1919년에 아프리카의 모처에서 개기일식이 일어났을 때 스탠리 에딩턴이라는 과학자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실험으로 증명해 보였습니다. 그 개기일식의 현장에서는 청명한 밤하늘에서와 같이 별들이 육안으로 보이거나 카메라에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스탠리 에딩턴은 그 개기일식 지점으로 가서 태양 주위의 별들을 카메라로 찍었습니다. 그리고 평상시의 사진과 대조해 보았는데 밤에 나타나는 별들의 모습과 낮에 관측된 별들의 모습이 다르더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빛이 최고의 속도로 일정하게 달리기는 하지만 매우 강한 인력이 작용하는 곳에서는 빛도 휘어지게 된다는 특수상대론을 사진으로 증명해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진에서 나타난 별들의 편향각 역시 아인슈타인의 주장과 일치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그 시간적 순서에 의해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관측자의 상태에 따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순서를 바꾸기도 하고 동시에 발생되기도 하고 하나로 통합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갈릴레이와 뉴턴의 고전역학과 아인슈타인의 현대역학 사이에는 아직도 많은 논쟁이 있고 이견이 있지만 신학을 공부한 저로서는 아인슈타인의 손을 백번이고 들어 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설명의 핵이라 할 수 있는 빛에 대한 개념이 성경에 그대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빛이라는 단어가 제일 처음 등장하는 곳이 어디지요? 창세기 1장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었던 무질서 위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을 하시자 빛이 생겨나지요? 하나님은 그 빛을 이라 칭하십니다. 그 단어가 히브리어로 입니다. 그 단어는 , 시간, 로도 번역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진술에 의하면 빛이 바로 시간이며, 날이며, 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은 관측자에게 물체의 상을 가시적인 것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모든 물체의 색깔은 빛을 받아 그 빛의 어떤 부분을 반사하느냐에 의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빛은 시간을 결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물체의 상을 가시화하는 힘을 갖는 것이며 공간을 공간으로 존재케 하는 우주 존재의 근원이요 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쉬운 말로 빛이 없으면 시간도 없는 것이고, 빛이 없으면 물질과 공간의 존재가 무의미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빛은 모든 것의 원형이며 기준이며 근원인 것입니다. 빛이 실체이고 다른 것은 다 모형일 뿐입니다.

 

성경은 빛의 세계, 즉 영원의 영역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없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곳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자연 과학 속에서도 입증이 된 것입니다. 빛보다 빠른 물체가 없고, 그 빛이 곧 시간이라면, 빛의 속도로 달리는 어떤 광자의 손목에 시계가 채워져 있을 때 그 광자의 시계가 갈까요? 안갈까요? 시간이란, 빛의 속도와 견주어 거기에 못 미치는 어떤 운동하는 존재들에게 감지되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운동하는 것의 시간은 느리게 가고 천천히 움직이는 것들의 시간은 빠르게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여행하고 온 사람들이 덜 늙는다는 실험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빛의 세계에는 시간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빠르게 달린다는 것은 그만큼 이 땅의 공간과 접촉이 적어진다는 이야기이고 그렇게 될 때 물질을 썩게 하고 후패케 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느려지게 되는 것이며 그 속도가 빛의 속도가 될 때, 다른 말로 빛과 존재가 연합이 될 때 그 존재는 빛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시간이 없는 영원한 현재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점점 이 세상이라는 공간에서 발을 떼어가는 과정을 통과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렇게 될 때 성도는 이 세상 속의 시간과 공간에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이 세상 땅과 상관없는 자가 되어 영원을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점점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시간과 관계없는 자들이 되어져 가는 것이고 그들을 성경이 나그네, 이방인, 유목민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간의 상대성은 인간의 심리에도 적용이 됩니다. 시간이라는 것, 그 시간의 최소단위인 1초는 국제 도량형 위원회에서 '절대온도 0K에서 바닥상태(ground state)에 있는 세슘-133(133Cs) 원자가 2개의 초미세 준위(hyperfine level) 사이를 전이할 때 발생하는 전자기파 복사의 919,2631,770 주기 동안 걸리는 시간'으로 그 양을 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슘 원자로 정밀하게 정의한 시간의 양과는 별도로 인간은 저마다 심리적 시계를 가지고 시간을 가늠합니다. 어떤 게 진짜 시간인지는 그 누구도 모릅니다.

인간은 어떤 기쁜 일이 닥치거나 좋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에는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걸 심리적 시간의 상대성이라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아름다운 여자와 앉아 있는 2시간은 2분처럼 느껴지고, 뜨거운 난로 위에 앉아 있는 2분은 2시간으로 느껴지는 것'이 바로 시간의 중요한 심리적 속성인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이라는 것도, 공간이라는 것도 어느 것 하나 절대적인 것이 없고, 빛이라는 것에 의해 상대적으로 존재하고 감지가 되는 것입니다.

너무 살기가 힘들어서 아이와 함께 자살을 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바다로 향하는 이의 눈에 보이는 차 창 밖의 풍경은 지옥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부모 형제를 만나기 위해 명절날 고향으로 내려가는 이의 눈에 보이는 풍경은 천국으로 보이는 것이 그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이라는 것이 이 땅에 와서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구별이며 그 구별된 것 중 빛의 편이 아닌 것을 소멸해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구별을 거룩이라 하고 소멸을 심판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빛은, 빛이 아니면서 빛인 척 하는 것들을 부수고 빛에 속한 것들을 빛의 세계로 이끄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첫째 날에 빛이 옴으로 말미암아 어두움과 빛의 구별이 일어났지요? 그리고 빛의 대척점에 있는 어두움은 이제 빛에 의해 소멸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는 결국 완전히 소멸이 되어 빛만 남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의 성취인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창세기의 첫째 날 안에 축약이 되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이라 칭하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빛의 세계라 하는 것입니다.(1:13) 하나님만이 실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 위를 운행 하시는 하나님의 신, 루아흐에 의해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절과 3절의 하나님의 신, 루아흐, , , 시간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3장에 반복되어 등장합니다.

(3:8-10)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날이 서늘할 때에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가 루아흐 하 욤입니다. 여기에서 , 이라는 단어 앞에 붙어 있는 가 정관사입니다. 그 어구를 직역하면 그 날의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 은 그 앞에서 이미 나왔던 것이라는 말이 되지요? 그러니까 라는 정관사가 붙어 있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여기에서 그 날은 다름 아닌 창세기 첫째 날의 으로 말미암은 그 낮과 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8절에 거니시는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오다, 강림하다라고 번역이 되어야 더 문맥에 어울리는 단어입니다. 아울러 8절과 10절에서의 음성, 소리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은 하나님의 음성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강림하실 때의 소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여호와가 강림하시는 소리를 듣고 일단 숨은 뒤에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부르시잖아요? 그러니까 8절과 10절의 소리는 여호와의 음성이라기보다는 구약의 여러 책에 나오는 것처럼 우레, 곡성, 바람등의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의 소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소리와 함께 강림하시는 하나님은 항상 심판의 하나님으로 오십니다. ‘빛이 있으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빛과 어두움이 섞여 있던 곳에 떨어지자 그 둘이 확연히 갈리고 한 쪽이 심판을 받지요? 바로 그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첫째 날의 그날의 하나님은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가져 오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날을 종종 심판의 날로 선포를 했던 것입니다.

(13:6)

6 너희는 애곡할 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1:15)

15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 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이렇게 그날은 구별의 날임과 동시에, 그 구별에 따른 심판이 행해지는 날, 즉 마지막 날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상의 것들을 종합하여 창세기 38절을 다시 번역을 하면 그 날의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강림하실 때에 그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가 됩니다. 거기에서 8절의 하나님의 파님이라는 단어라 했습니다. 그 단어는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도 있지만 임재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 단어라 했지요? 그리고 그 단어는 이라는 단어와 혼용되어 쓰이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6:25-26)

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러니까 창세기 38절 이하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러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정녕 죽으리라의 언약에 의해 죽음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낯은 과도 혼용해서 쓰이는 단어라 했지요?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흑암으로 자진하여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날의 하나님으로 강림을 하셔서, 다른 말로 빛의 하나님, 낮의 하나님으로 강림을 하셔서 아담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소리와 함께 심판의 하나님으로 오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오셔서 무엇을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심판을 하시긴 하시는데 흑암 속에 빛을 비추셔서 흑암은 소멸시켜 버리시고, 그 흑암과 구별되는 빛에 속한 것들을 건져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벧전2:9)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그 일을 행하실 것인가? 그게 창세기 315절에서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8절에서 그 날의 하나님’, 창세기 13절의 빛의 하나님으로 강림하신 하나님께서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을 갈라내시겠다는 언약을 주십니다. 이미 한패가 되어 있는 뱀과 여자를 원수로 만들어 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그건 둘 중 하나를 갈라내어 한 쪽은 하나님 편으로 끌어당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뱀은 여인의 후손의 발뒤꿈치를 물고 피를 빠는 형식으로, 그러나 여인의 후손은 자기 피를 빨고 있는 뱀의 머리를 부수는 방식으로, 그 일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거기에서 뱀은 바로 우리 성도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단순히 우리를 미혹하는 우리 밖의 대상으로서의 어떤 악한 존재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실 때 뱀에게 너는 흙을 먹으라고 하시지요? 그런데 뱀이 정말 흙을 먹나요? 흙 먹는 뱀 보셨어요? 흙 먹는 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금 뱀에게 무엇을 먹이로 주시는 것입니까? 흙으로 지어진 인간을 뱀의 먹이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뱀의 휘하에서 열심히 여인의 후손의 발뒤꿈치를 물고 피를 빠는 인간들의 마귀적 본질인 뱀의 머리를 부수시는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성도가 빛의 세계로 들어오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약함으로 강함을 부수는 형국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마귀의 먹잇감에 불과한 우리는 죽는 날까지 예수를 물어뜯는데 말 먹이통으로 우리의 먹이가 되셔서 오신 예수가 우리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다 뜯기고 결국 은혜로 우리를 부수어 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증거로 역사상 첫 번째 제사의 제사장이 되십니다. 아담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한 첫 번째 희생 제물을 하나님께서 잡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정성껏 그 제물을 발라내시어 죽어야 할 자의 부끄러움을 가려 버리시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그 짐승이 죽을 때 아담과 하와가 죽는 것입니다. 심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녕 죽으리라의 하나님의 언약은 무죄한 짐승의 죽음 속에서 성취가 되고 그 짐승의 죽음이 아담과 하와의 죽음을 막아서는 것입니다.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해서. 그 이야기를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7:26~28)

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제물이 누구입니까? 예수입니다. 대 제사장은 누구시지요?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지금 창세기에서 짐승을 잡아 아담의 부끄러움을 가리시는 분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이세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잡혀 죽는 무죄한 짐승이 누구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입니다.

 

이렇게 그 날의 하나님’, 즉 창세기 첫째 날의 빛의 하나님께서 흑암 위에 운행 하시니 , , ,’이 생겼듯이, 선악과를 따먹고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되어 버린 아담과 하와 위에 그 날의 하나님께서 강림하시니까 죽어야 할 흑암이 빛으로 끌어당겨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38절 이하의 이야기는 심판의 이야기가 아니라 구원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즉 첫 창조 속에 속한 땅의 것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기각되고, 부정이 되며, 새 창조의 영역으로 옮겨지는 구원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한 현실은 구약에서의 안식일이 깨지고 안식 후 첫날이 교회의 예배 날이 되는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7일을 주기로 돌아가는 이 시간, 날의 완료지점은 안식일인 일곱째 날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7일째 날에 복을 주시며 그 날을 거룩하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2:3)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 이더라

이게 역사 속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 시간에 복이 주어지고 그 시간과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은 그 시간과 날 속에 어떤 복된 메시지가 들어 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야 할 아담을 찾아가셔서 그 흑암의 아담을 빛으로 불러내시는 빛의 하나님, 날의 하나님이 일곱째 날의 하나님이 아니라 첫째 날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7일 주기의 역사와 시간 속에서 첫째 날은 안식 후 첫날 이지요? 그 말은 이 세상 속의 첫 창조와 그 첫 창조 속의 안식은 모형에 불과한 것이며, 부정되고 부인되어야 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짜 시간의 완료지점, 시간의 지성소는 빛의 하나님에 의해 완료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걸 그대로 요한복음으로 가져가 보자고요.

어두움인 이 세상에 빛의 하나님이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2절의 말씀처럼 그 어두움들을 덮으셨습니다.(라하프, hovering) 운행하다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번역이 되면 스케노오가 되는데, 그 단어가 요한복음 1장에 등장합니다.

(1:9~14)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

빛의 하나님, 그 날의 하나님께서 이 땅에 강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두움의 세상이 그 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게 육신과 혈통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은 그 혈통이나 육정을 부정해 버리십니다. 그것들은 절대로 하나님과 화해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알아볼 수도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게 이 세상에서 왕이 되어 살고자 하는 아담 군상들의 본능이며 속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윗 왕의 혈통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절대 의존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도 종으로 부리고 싶어 하는 이 세상 왕들의 세상에 왕의 혈통으로 오셔서 그 세상 왕들을 품어 안고 죽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가 하면 역시 하나님의 신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덮는 방식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어구가 있지요? 거기에서 거하시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스케노오입니다. 정확한 뜻은 장막을 치다, 위로 텐트를 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어두움(혼돈과 흑암과 공허) 위로, 날의 하나님이 그 것들을 라하프덮어 버리시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 곳이 요한복음 20장입니다.

(20:19~22)

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 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안식 후 첫날이 나오지요? 창세기의 첫째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떠나 전부 다 밤으로 도망을 쳤던, 창세기의 그림으로 다시 그려드리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나 나무 뒤에 숨어 버렸던, 제자들에게 빛이신 예수가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평강을 선물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주어지게 된 것입니까? 예수라는 대 제사장이 예수라는 제물로 영 단번에 제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다락방 속의 벌거벗은 아담들의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가려지더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흑암이 벗겨지고 빛의 나라가 그들을 덮쳐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의 첫째 날이나 38절 이하의 서늘한 날의 이야기나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으로 가면 그 똑같은 그림이 또 나옵니다.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소리와 함께 하나님의 신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자들 위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 위에 임하십니다. 그 날의 하나님, 빛의 하나님께서 흑암 위에 임하자 흑암과 빛이 선명하게 갈리지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갈라지고 나머지가 흑암으로 분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이 어떤 날이었습니까? 안식 후 첫날 이었습니다. 오순절 날은 유월절 안식일로부터 일곱 번째 안식일인 49일 째의 다음날이니까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창세기 첫째 날의 그 창조와 창세기 38절의 그날의 하나님의 이야기가 성경에서 계속 반복되어 점층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하나님의 사역은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완성이 됩니다.

(7:15~17)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 이러라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 나라 백성들 위에 장막을 치고 계시지요? 창세기 12절의 라하프, 운행하시다라는 단어가 스케노오, 거하시매라는 단어로 요한복음에 등장하더니 요한계시록에 장막을 치다라는 단어로 똑같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단어도 역시 스케노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장막을 치심으로 백성들이 무엇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까? 해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해라는 것은 이 세상 빛의 발원지를 말합니다. 이 세상 빛의 총화.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빛이 부정을 당합니다. 빛은 날이요, 날은 시간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에서 해가 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 세상 속의 날과 시간, 즉 역사와 역사의 소산물들은 한시적인 역할이 끝나면 모두 소멸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역사와 시간과 공간의 역할이 무엇이지요? 인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과 구원에 도달 하려고 할 때 그 방법과 수단으로 채택하고, 쌓고, 채우는 것들이 어떻게 무용한 것인지를 체휼케 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역사와 시간을 자신들의 노력과 열심과 열매들로 가득 채워가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은 결국 그 모든 것들의 무용함과 무익함을 폭로해 버리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해 아래 있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들로도 궁극의 행복과 구원에 도달 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고 오직 행복과 구원의 근원이신 예수만을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시간과 공간의 역할입니다.

(21:23~25)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25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이곳이 바로 완료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곳에 해와 달이 없습니다. 세상이 추호도 의심 없이 빛이라고 확신했던 빛의 발원 체들이 전부 소멸됩니다. 그리고는 진짜 빛, 진짜 날, 진짜 시간, 진짜 땅이신 예수가 모두를 품어 안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그룹들과 화염검으로 막아버리신 것입니다. 그건 인간이 타락을 함으로 해서 하나님이 심통이 나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 실과, 즉 빛의 세계로의 진입은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하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 길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열린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생명나무가 감추어지는 것이고, 그 생명나무 실과를 얻어내기 위해 이 인간 세상의 빛들이 총 동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역사입니다.

(3:22~24)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동쪽으로 쫓아내시고 동쪽에 그룹들과 화염검을 두십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 빛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동쪽을 통하여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전체의 과정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 이야기가 에스겔서 10장과 11장에서 구체적으로 그려지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있던 곳에서 바벨론으로 쫓겨 가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쫓겨나갈 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가십니다.

(11:15~17)

15 인자야 예루살렘 거민이 너의 형제 곧 너의 형제와 친속과 이스라엘 온 족속을 향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 하였나니

16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17 너는 또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열방 가운데서 모아내고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

이스라엘이 범죄 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약속의 땅에서 쫓아 내 버리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이 쫓겨 나간 그 곳으로 함께 가셔서 그들의 성소가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 어디로 가시는지 보세요.

(11:23)

23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중에서부터 올라가서 성읍 동편 산에 머물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 성읍 동편 산에 머뭅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스라엘이 돌아 올 때 하나님의 영광이 먼저 동편 산에서부터 성전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에덴에서 쫓겨 날 때, 다른 말로 생명나무실과로부터 쫓겨 날 때 하나님께서 그들만 쫓아내신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에덴 동편으로 나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앞장 서셔서 그들을 어떻게 다시 약속의 땅으로 밀고 들어오는지를 그들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출애굽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의 땅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먼저 쫓겨 갑니다. 그들이 무슨 죄를 지어서 쫓겨 간 것인가요? 하나님께서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시기 위해 당신의 언약에 맞추어 그들을 애굽으로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굽에서도 내내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어떻게 알지요? 하나님께서 베델에서 야곱에게 내가 너를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야곱과 그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에도 우리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 왜 굳이 빙 돌아서 동쪽으로 넘어가 동쪽에서부터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지 아시겠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 사건을 통하여 생명나무실과가 풍성한, 상징적 하나님 나라인 가나안 입성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인지를 교훈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의 이야기를 그들의 삶으로 설명을 해 주셨던 것입니다.

동쪽으로 쫓겨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동쪽으로 돌아오는데 그 길을 두루 도는 화염검을 가진 천사가 지키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첫발을 딛었을 때 그를 맞은 게 누구입니까?

(5:13~15)

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14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동쪽에서 가나안으로 진입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창세기 3장의 그 현실이 여전히 유효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칼을 뽑아들고 신을 벗으라고 합니다. 그 말은 너희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 땅에 들어갈 수 없으니 신을 벗고 내게 업히라는 말입니다. 이 땅은 은혜로만 들어갈 수 있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 군대 장관이 어떻게 여호수아를 들여보내 줍니까? 다른 것 없습니다. 할례를 행하라고 합니다. 할례란, 내 대신 누군가가 희생을 당해서 내가 살아났다는 흔적을 몸에 지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명나무실과는 예수의 희생으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임을 아는 자만 빛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32장을 보면 야곱이 가나안에서 쫓겨나서 다시 동쪽으로 가나안으로 들어올 때 가나안 초입에서 하나님의 사자들, 하나님의 군대를 만납니다. 야곱이 그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짓습니다. 그리고는 그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싸우지요? 역시 화염검을 가진 그룹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지지 않습니다. 그 말은 인간은 절대 자신의 힘으로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땅에 하나님을 이겨먹으려 하는 자가 어떻게 들어갑니까? 그런데 뜬금없이 하나님께서 야곱의 손을 들어주시면서 네가 이겼다하고 선언을 해 주십니다. 거기엔 두 가지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을 이겨 먹으려 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은혜로 덮으셔서 당신의 나라로 입성시키시는 것이라는 은혜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죄인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손의 대신의 희생, 대속의 희생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 뼈를 치시지요? 그 환도 뼈라는 단어 야레크는 남자의 씨앗이 생성되는 기관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 야레크라는 단어는 자손, 후손이라는 의미로도 혼용되어 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 뼈를 치셨다는 말은 다른 말로 야곱의 후손을 치셨다는 말과 같은 말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후손, 그가 누구입니까?

(3:16)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 뼈를 치신 것은 야곱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치심으로 죽어야 할 야곱이 살아나서 승리의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성막의 문이 어느 쪽으로 나 있습니까? 동쪽입니다. 지성소의 휘장은 어느 쪽을 향해 있지요? 동쪽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막과 성소, 그리고 지성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동쪽을 반드시 통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막과 지성소를 가리고 있는 천에는 그룹들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창세기 3장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성막에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나요? 성막의 제일 첫 관문은 번제 단입니다.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의 희생이 있어야 동쪽 문을 통과하여 성막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성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 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흠 없는 어린양의 피를 들고 들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막혀 있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해서만 열리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간들의 빛 행세는 다 기각이 되고, 인간들의 역사와 그 역사를 채우고 있는 행위가 전부 부정 당하는 것입니다. 그게 다윗 왕이 되고 싶어하는 이 역사와 인생들의 말로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바로 그 다윗 왕의 혈통으로 오셔서 육신으로 죽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속에서 왕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우리의 인생도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우리의 왕 됨의 추구, 용사 됨의 추구가 부수어지는 형국으로 우리의 인생이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 역사 속에서 시간과 공간과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사람의 거룩을 전부 부수고 들어오십니다. 그래서 거룩한 안식일이 십자가에서 박살이 나는 것이고, 거룩한 이스라엘의 옛 성전이 십자가에서 부수어 지는 것입니다.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시지요? 그리고 거룩하다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마귀새끼들로 폭로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라는 말 자체가 구별하다라는 말입니다. 구별한다는 것은 거룩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힘으로 거룩한 자가 되겠다는 바리새인들의 유대주의를 십자가로 박살을 내 버리신 것입니다. 그렇게 이 역사 속의 시간과 공간과 사람은 죽고 하늘의 시간, 하늘의 공간, 하늘의 사람만이 남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현실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오셔서 죽어 버리시는 지 아시겠지요? 여러분도 그렇게 죽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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