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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 2 아버지와 두 아들의 비유

 

(15:11~32)

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예 수님의 비유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는 아주 익숙한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 비유를 이해하기를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회개를 하고 돌아왔더니 아버지가 문밖에 서서 기다리시다가 맞아 주셨다. 그러니까 우리도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자.’정도로 이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주인공이 탕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 역시 아주 이기적인 인본주의적 요소가 많이 묻어있는 그런 해석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비유의 주인공은 아버지라 생각을 합니다. 저는 이 비유를, 아버지가 집을 떠난 두 아들을 어떠한 사랑과 인내와 기다림으로 받아주시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뱀 톤 특강의 주제 설교자였던 해스팅스 라솰을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이 이 비유 안에 무슨 십자가와 예수가 들어있냐고, 그저 회개만 하면 모든 인간은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알매니언주의 적 해석을 하곤 하는데, 그건 이슬람 교인들이 이 비유를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물론 존 스토트 목사님께서 거기에 대해 잘 반박을 해 주셨지만 제가 보기에는 너무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어떻게 십자가와 예수를 찾아낼 것인가?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먼 저 우리가 이 비유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을 할 것인가? 아니면 스토리로 해석을 할 것인가?’에서부터 출발을 해야 하겠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 비유를 해석을 하시면서 한 부류는 알레고리로 해석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다른 한 무리는 스토리로 해석을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근거로 이런 저런 이유를 대고 있는데, 저는 그러한 논의가 사실상 아주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논쟁이라 생각을 합니다. 알레고리적으로 해석을 하던 스토리 적으로 해석을 하던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만 정확하게 받아 챙기면 되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비유 안에는 알레고리적 요소와 스토리 적 요소가 공존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왜 그렇게 생각을 하는지는 오늘 강해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 렇다면 이제 이 비유를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 이 비유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고대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에 대해 조금 정보가 있어야겠지요? 당시 고대사회, 특히 유대사회에는 부모가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 줄 때 큰 배경으로 항상 동생들의 두 배를 받았었고, 동생들이 나머지를 갖고 나누는 식으로 유산 분배를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유산은 항상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자식들에게 분배가 되었고, 혹 부모가 살아계셨을 때 유산 분배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부모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그 재산의 소유권과 처분권과 관할권으로 여전히 부모에게 있었습니다. 자식들은 부모가 돌아가셔야 비로소 그 재산의 처분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간의 예의와 지켜야 할 규범으로 지금 보비로 훨씬 엄격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의 율법은 패역한 자식에 대한 부모와 사회의 처벌을 이렇게까지 규정을 하고 있습니다.

 

(21:18~21)

18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 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19 그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20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만 일 우리 부모님들이 이렇게 우리를 처벌해왔다면 우리 중에 살아있을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 율법은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패역한 죄인들에 대한 형벌이 에둘러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패역한 자들은 모두 돌에 맞아 죽어도 싼 그런 죄인들임을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유대인들은 아버지에게 불순종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자식들은 돌로 쳐서 죽여도 된다는 그러한 가부장적 사고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런 문화 사회적 배경 속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둘째 아들의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이 비유의 청자 중 한 무리인 유대인들은 아마 그 비유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분노를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철저한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아버지가 아직 시퍼렇게 살아계신 데도 불구하고 감히 유산을 청구한 아들, 청구한 정도가 아니라 처분권까지 행사하기 위해 아버지 몰래 재산을 처분하여 이방 나라로 도망을 간 아들입니다. 당시에는 아버지가 살아계심에도 아버지의 유산의 처분권을 행사하려 했던 자들을 살인자와 방불한 죄인으로 취급을 했었습니다. 그건 곧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하는 마음에서밖에 나올 수 없는 그런 패역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자식은 아버지를 죽인 자식 취급을 받아도 무방한 그런 시대였습니다.

율 법의 산술계산대로 하면 큰 아들이 아버지 재산의 3분의 2를 갖고 둘째가 아버지 재산의 3분의 1을 갖는 것이 마땅하지만 둘째가 미리 그 재산의 처분권을 행사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9분의 2정도를 미리 받았을 것입니다. 그게 유대인들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래도 그건 어마어마한 액수였을 것입니다. 나중에 그 아버지가 아들의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좋은 옷을 입히고, 동네잔치를 벌였으며, 많은 종들을 부리고 있었고, 아들 또한 우리 아버지 집에서는 종들도 양식이 풍족하다고 말을 한 것을 보면, 아버지가 대단한 부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재산을 허랑방탕 다 써버리고,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짐승인 돼지우리 속의 동거인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유대인들이 탈무드에 돼지를 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라고까지 기록을 해 놓았을 만큼 혐오했던, 돼지치기가 되었습니다.

그 말은 곧 그들이 개 취급도 안했던 이방인들의 종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비유를 듣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내용은 둘째 아들을 개보다 못한 자로 여기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절대 돼지를 키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 인근 나라에는 유대인들이 400만 명이나 디아스포라로 퍼져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지독한 민족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거주하던 이방나라에서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너나할 것 없이 힘을 모아 자기 동족을 도와주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은 어찌된 것이 그런 도움도 못 받고 이방인의 돼지치기가 된 것입니다. 그 말은 이 둘째 아들이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지키던 선민사상 안에서의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더욱 더 큰 분노에 사로잡히게 되었겠지요?

여 러분, 제가 다윗에게 비유로 이야기를 했던 나단의 심정으로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둘째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누가 제일 먼저 생각이 나십니까? 종들도 풍요 속에서 호강을 할 만큼 엄청난 풍요의 주인이시오, 사랑의 아버지시오, 은혜와 인내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자기 안에 내재된 제한된 자원으로 자신을 행복하게, 안전하게 만들어 보겠다고 하나님을 떠난 아담이 생각나지 않으세요? 그런데 그 아담 안에는 누가 들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법을 받고도 전혀 그 법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었던 노아와 모세, 이스라엘을 비롯한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니까 둘째 아들은 구원받기 이전의 우리 자신의 모습이며, 구원 얻은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 안에 풍성히 남아있는 우리의 옛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 돌에 맞아 죽어도 싼 그 둘째는 예전의 우리였을 뿐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생 각해 보세요.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서도 하늘에서 풍성하게 주어질 하늘 아버지의 풍요를 진득하니 기다리는 법이 없지 않아요? 이 세상에서 그 하늘의 풍요를 미리 사용할 수 있는 처분권을 달라고 떼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자기가 쓸 수 있는 풍요로운 유산을 위해, 아버지가 빨리 죽든 말든 아무 상관하지 않고 아버지를 졸랐던 둘째 아들의 아버지 살해 행위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비유를 읽으면서 얼마나 이 둘째에게 욕을 했던가요? 정작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수시로 살해하고 있으면서.

 

그 둘째가 아버지께 어떻게 돌아옵니까? 본문 17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15:17-18)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여 러분이 여기에서 주의하여 읽으셔야 하는 어구가 스스로 돌이켜라는 어구입니다. 이 개역 성경의 번역만 보면 마치 회개의 주도권이 둘째 아들에게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스스로 돌이켰으니까요? 그래서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이나 이슬람 교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도 얼마든지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바울에 의해 조작된 엉터리 복음이라고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여기에서 스스로 돌이켜라고 번역이 된 에이스 헤아우톤 데 엘돈이라는 어구를 직역을 하면 자기 자신에게로 왔다,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자기 자신을 거울로 비추어 보았다라는 뜻입니다. 돼지우리에서 돼지들과 쥐엄 열매 쟁탈전을 벌이고 있던 그 둘째 아들이 어느 순간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비추어 보고, 자신이 돼지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누가 그에게 개입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자신의 죄 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유일한 근거가 뭐지요? 누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치러 오십니까? 성령 하나님. 즉 하나님의 자녀가 자신의 죄인 됨을 자각하게 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아버지의 불가항력적 은혜에 의해서입니다. 이건 제가 추론해 낸 이야기가 아니라 문맥에 숨어 있는 내용입니다.

 

사 실 오늘 본문은 누가 복음 15장 전체의 결론 부분입니다. 누가 복음 15장은 하나의 주제로,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누가복음의 핵심장입니다. 성경주석가인 예레미야스가 누가복음 15장을 누가복음의 심장이라고 이야기할 만큼, 이 비유를 담고 있는 누가복음 15장은 복음의 핵심 내용을 풍성하게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장입니다. 거기에 예수와 십자가가 빠져 있다면 말이 안 되지요? 이 누가복음 15장의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하는지 볼까요?

 

(15:1~3)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지 금 누가는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행 내러티브의 거의 정 중앙에 이 비유를 배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1절에 등장하는 세리와 죄인들은 심지어 유대인들도 아닌, 유대인들의 가치관 속에서 개만도 못하게 여겨졌던 사마리아 사람들, 그것도 하층민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반기시더니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행에 동행을 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원망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원망의 내용이 담긴 2절에 쓰인 동사들이 전부 현재시제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이 습관적이며 반복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행에 동행을 했을 만큼 예수님께 호감을 갖고 있었고, 배움에 갈급했던 종교적 열심이 아주 대단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예 수님께서 그들의 불평과 원망을 들으시고는 비유를 말씀하시는 데, 세 가지 비유를 연달아 붙여서 던지십니다. 저는 이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를 네 가지 비유로 봅니다. 왜 그런지는 조금 있다가 설명을 해 드릴 것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난 비유의 이야기가 세 가지로 나누어져 있는 듯 보이므로 제가 일단 세 가지라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 가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3절의 비유라는 단어의 에 관한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지금 세 가지 이상의 비유를 말씀하실 것인데, 누가는 3절의 비유라는 단어를 단수로 썼습니다. 그것은 지금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모든 비유가 하나의 비유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오늘 공부하고 있는 이 비유 앞에 두 비유가 더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잃은 양의 비유이고, 두 번째가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입니다.

잃은 양의 비유는 100마리의 양 중에서 한 마리를 잃어버린 목자가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를 버려두고 한 마리를 찾으러 갔다가 찾아와서는 잔치를 베푼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비유는 열 드라크마를 갖고 있는 아낙네가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리고는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그 한 드라크마를 찾고는 기뻐한다는 내용입니다.

첫 번째 비유에서는 양이 100마리입니다. 그 중 한 마리를 잃었다가 찾습니다. 두 번째 비유에서는 드라크마가 열 개입니다. 그 중 하나를 잃었다가 찾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비유에서는 두 아들 중 하나를 잃었다가 다시 찾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점층적인 수사기법을 동원하여, 100마리 중 하나를 잃었다가 다시 찾아도, 신부에게 귀중한 혼수품인 열 드라크마 중 하나를 잃었다가 다시 찾아도 그렇게 기쁜데 두 아들 중 하나를 잃었다 찾았을 때 그 아비의 기쁨이 얼마나 크겠는가를 점층적으로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짐승, , 사람, , , 둘 이렇게 점층적이며 점강적인 개념과 숫자들을 동원하여 인간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관심과 애정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이 세 비유는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뜬금없이 7절과 10절에서 그 비유의 이야기를 회개와 연결을 시키십니다.

 

(15:7,10)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잃어버린 양이, 잃어버렸던 드라크마가 주인을 찾은 적이 없습니다.

양 을 잃어버렸던 목자가 나머지를 버려두고 그 잃은 양을 찾아 다녔던 것이고, 드라크마를 잃었던 여자가 등불을 들고 비로 쓸며 드라크마를 열심히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주인에 의해 찾아진 것들이 회개를 한 것이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을 하신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앞 두 비유에서 회개란, 찾아지는 쪽에서 생산해 내고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찾는 쪽에서의 열심에 관한 개념이라는 것을 도출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비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똑같이, 회개하는 어떤 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살펴보았던 스스로 돌이켜’ ‘ ‘에이스 헤아우톤 데 엘돈이라는 어구는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 회개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쓰였던 어구입니다. 그러니까 돼지우리 속에서 돼지 된 자신의 모습을 올바로 인식하고 자각하게 된 둘째 아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찾아짐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한 것이라고는 자기에게 주어진 제한된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행복과 쾌락을 위해서 돼지처럼 산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의 마음이 그에게 임하여 그 자신이 자신의 돼지 됨을 바라보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문맥을 잘 고려하여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러니까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의 행복과 만족을 추구하며 사는 삶이 돼지우리 속의 돼지 같은 삶이며, 자신들이 추구하는 모든 세상의 힘들은 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는 것을 올바로 자각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저 사는 동안 지었던 몇 가지 죄를 내어놓고 눈물 콧물 짜는 게 회개가 아니란 말입니다.

 

예 수님은 유대인들이 개 취급도 안했던 사마리아 땅에서 자신을 찾아 온 세리와 창기들과 죄인들을 둘째 아들 속에 넣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지금 너희들의 율법 관과 너희들의 관습에 의해 그 둘째 아들의 행위에 그를 죽이고 싶을 만큼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잘 안다. 맞다. 그들은 그렇게 돌에 맞아 죽어도 싼 자들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은 그러한 자들의 더러움까지도 모두 덮어씌울 만큼 위대한 것이다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다 용서해 주신다는 교훈을 던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하러 오신 당신의 가장 중요한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곁에 모인 사마리아의 세리들과 사마리아의 창기들, 사마리아의 죄인들, 그리고 유대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가를 계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비유 속에서는 십자가가 어떻게 숨어 있는지 볼까요?

아 들이 외부에서 침투한 은혜의 결과로 자신의 돼지 된 모습을 자각을 하자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욥이 자식과 재산과 아내와 이웃과 명성과 건강을 모두 잃고 돼지우리 속의 둘째와 같은 그런 모습이 되었을 때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지요? 야곱이 아버지와 형과 고향과 유산을 모두 남겨둔 채 고향을 떠나던 날 하나님을 보게 된 사건도 일맥상통한 사건입니다.

그 렇게 인간은 자신의 티끌 됨과 질 그룻 됨을 올바로 자각하기 전에는 절대로 하나님 아버지께로 자신을 의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도 구원을 얻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폭로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도저히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로 복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수긍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되는 고백인 것입니다. 유대의 율법에 의하면 둘째는 동네에 들어서는 순간 돌에 맞아 죽을 것입니다. 본인도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인정하고 감수하기로 합니다. 마치 우리 성도가 신앙생활을 통하여 자신의 돼지 됨을 깨닫고, 아버지가 지금 당장이라도 날 지옥에 보내신다 할지라도 난 아무 할 말 없는 그런 죄인이라는, 자기부인의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을 미리 그림으로 보는 것 같지 않으세요? 그리고는 아버지 집의 종이라도 되겠다는 심정으로 아버지를 찾아갑니다. 고라 자손의 시편에 그 둘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84:10-11)

10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 이니이다

 

이 건 단지 오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과 고라 자손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모든 자들의 입에서 궁극 적으로 나와야 하는 고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실체와 본전을 알면 알수록, 그리고 하나님의 크심과 위대하심을 알면 알수록 점점 우리 자신에 대해 자신이 없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하나님, 전 하나님 집의 문지기도 과분합니다. 아니, 저는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저를 지옥에 보내신다고 해도 아무 할 말 없는 그런 무익한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자로 낮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들 자신 만만 한 것 같아요. 자기들이 지금 뭔가 하나님 앞에 떳떳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요, 서기관들이었던 것입니다.

 

차 치하고, 그렇게 아들이 자신의 실존을 처절하게 깨달은 뒤,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문밖에서 그 아들을 기다리고 계시다가 상거가 아직 먼데도 뛰어나가 그 아들을 맞이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우리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어른이 경박스럽게 뛰는 것은 아주 천박한 일로 간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을 확인하자마자 냅다 뛰어가신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 니 그보다 먼저 그 둘째가 아버지가 사는 동네로 돌아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어떤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을까요? 동네사람에게 발견이 된 둘째가 동네 사람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는 장면을 누구나 떠 올렸을 것입니다. 그 둘째가 저지른 일은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열 번 맞아죽어도 싼 그런 죄였으니까요. 당시 유대인들의 결혼 적령기가 열여덟에서 스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좀 더 서둘렀던 사람들은 열 넷에서 열다섯에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러니까 이 둘째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열일곱 살이 안 되었던 아이입니다. 그런 어린 녀석이 당시 유대의 관습 속에서는 아버지의 목숨과 같은 유산을 물려받아 처분까지 해 버렸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지요? 이제 아버지가 왜 뛰어 나가셨는지 아시겠습니까?

 

아 버지는 그 아이가 다른 이들에게 맞아죽기 전에 먼저 달려 나가신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다가 발견하신 것이 아니라 아들이 나간 그 순간부터 아들의 삶에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 하나님입니다. 침 삼킬 동안도 우리를 놓치지 않으시고 매 순간 우리와 동행을 하시며, 하 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는 우리의 자기중심의 삶이 어떻게 돼지와 같은 삶에 불과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 주시느라 아버지는 아들의 패역함을 허락하신 것이고, 아들의 이방 나라 행을 허락하신 것이며, 아들이 돼지우리 속의 쥐엄 열매를 다투는 자로 전락한 것도 그냥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만일 아버지의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면 아버지는 문밖에서 기다리실 것이 아니라 이방 나라로 사람들을 보내거나 직접 나서서 아들을 찾아오셨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 만일 우리에게, 아버지의 은혜를 떠난 무리가 결국 어떤 지경으로 파산을 하게 되는 것인지, 이 지옥 같은 현실을 경험하밖에자각하고 아버지께로 눈을 돌려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만을 꼭 붙드는 자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 우리를 이 이방 세상에 놔두시는 것입니다.

 

성 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삶이 돼지우리의 삶이며, 파산의 삶이라는 것을 삶으로 배워야 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냥 이 돼지우리 같은 세상 속에 놔두시는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소중함을 100% 스스로 경험하고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가 성화는 100% 하나님이 하시는 것임과 동시에 100% 우리가 하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100% 노력해서 성화의 절정에 이르러야 한다는 취지에서 한 말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소중함과 십자가 은혜의 필연성을 100% 경험하고 습득해야 한다는 의미로 한 말인 것입니다. 쉬운 말로 이 세상의 돼지우리 됨과 이 세상 힘들의 쥐엄 열매됨을 우리의 인생 속에서 경험하여 자각해야 된다는 의미에서의 100%인 것입니다.

 

이 비유의 마지막 절을 보면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것인가가 아주 선명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5:32)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 버지는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아버지를 떠나 자신의 쾌락과 행복만을 위해 살았던 둘째는 율법에 의해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그 자식이 죽었다가 다시 산자라고 선언을 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가 언제 죽었다가 살아났습니까? 그런데 아버지가 그렇게 선언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둘째 아들처럼 죽어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너희는 이미 벌을 받아 죽었다고 선언을 해 버리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다시 살려 내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버지가 지신 십자가 안에서.

 

아 버지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자식이 동네에 들어서자 자식이 당할 수모를 직감하십니다. 그래서 뛰시는 것입니다. 그 수모를 아버지가 대신 당하시는 것입니다. 뛰어간 아버지가 율법에 의해 죽어야 할 아들에게 화려한 옷과 신발과 반지를 끼워 버리십니다. 용서되지 못한 아들을 아버지가 먼저 용서해 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에 위배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아버지는 스스로 율법을 파기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동네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십자가입니다. 아버지 스스로가 율법을 허무시고 아들을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율법을 어기신 대가로 사형언도를 받으십니다. 그리고 집행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아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게 복음이며 그게 구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 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대로 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발견했을 때 반드시 율법대로 벌을 주어야 합니다. 그게 구약의 율법입니다. 따라서 자기 마음대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버리는 우리 자신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간음 한자, 살인한 자는 돌로 쳐서 죽여야 하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갚아주어야 하는 것이 모세의 율법입니다. 그런데 죄 지은 자가 율법에 의해 정죄당하고 심판당하지 않을 수 있는 시대가 도래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몽땅 도말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가 되셔서 스스로 심판과 정죄를 받아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돌에 맞아 죽어야 마땅한 죄가 이렇게 버젓이 우리 안에 있는 데도 용서를 받아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율법의 채무가 도말된, 하나님의 은혜의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떨어진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지 우리 성도들의 자발적이고 기특한 회개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비유의 대미는 큰 아들이 장식을 하고 있습니다.

100마리 양중의 하나, 열 드라크마 중의 하나, 두 아들 중의 하나, 이제 하나 중의 하나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큰 아들에 대해서 우리가 곡해하고 있는 것이 큰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은 나쁜 아들이라고 성급히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큰 아들 역시 우리 하나님 백성들의 패역한 현실을 보도하는 또 다른 모형인 것입니다. 큰 아들이 일차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이들은 이 비유의 서두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비유 또한 알레고리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이 비유 안에도 적당한 은유가 들어 있습니다.

그 런데 이 큰 아들은 둘째 아들과는 사뭇 달라 보입니다. 둘째가 자기 몫을 다 가지고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사는 동안 첫째는 아버지의 밭에 나아가 열심히 일을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를 지키며 살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 자기 집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슬며시 집안의 종을 불러 무슨 일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유산을 챙겨서 이방 나라에 가, 창기들과 함께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돌아온 자기 동생을 환영하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큰 아들이 화가 났습니다. 어떻게 자기처럼 성실한 사람에게도 한 번도 베풀어주지 않은 잔치를 그 돌에 맞아 죽어도 싼 자에게 먼저 베풀어 주냐는 것입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께 노합니다.

 

(15:28-30)

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큰 아들이 노해서 집에 들어오지 않자,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맞이하실 때와 똑같이 또 문밖으로 나오십니다. 그리고는 그 아들에게 잔치자리로 들어오라고 권하십니다. 28절에 권하다라고 번역이 된 파라칼레오라는 단어는 보혜사 성령을 가리키는 파라클레토스와 뿌리가 같은 단어입니다. ‘초청하다, 위로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여기에 파라칼레오라는 단어를 쓰심으로 아버지가 큰 아들을 잔치자리로 초청하는 장면을 성령의 초청과 위로와 연결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같은 한량도, 첫째 같은 교만한 자도 다 품으시고 부르시고, 초청하시는 풍성한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예수께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자신에게 내재된 제한된 자원으로, 이 세상의 힘을 쌓아서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세상 적 유토피아에 도달하려 할 때 나타나게 되는 현상이 어떠한 모양으로 나타나게 되는지 아세요?

첫 번째가 둘째 아들처럼 완전한 파산의 상태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하나님 없이 이 세상 것들로 참 만족과 참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늘 부족함에 시달리고, 늘 공허와 심심함에 안절부절 합니다. 그게 돼지우리 속의 탕자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여전히 자신의 힘을 부인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신뢰하며,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이들에게 종교심이라는 것이 가입을 하게 되면, 그게 위장된 성실이라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여 전히 자기 자신이 삶의 중심입니다. 아버지의 영광이 자신의 영광이 되고, 아버지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이 되는 그러한 하나님 자녀의 삶이 아닌, 자기 자신의 필요에 의해 아버지의 말을 들어주는 척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이 세상 속에서 자기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켜주는 절대자의 도움과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성실하게 행위라는 것들을 내어 놓습니다. 그토록 성실하게 아버지의 명을 좇아 열심히 살았던 큰 아들이 아버지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지 못하지요? 아버지는 기쁘신데 큰 아들의 입에서는 원망과 불평만 나옵니다. 왜 자기보다 남을 더 사랑하느냐는 것이지요.

 

그 렇게 무언가 보상을 바라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을 성경은 이라고 부릅니다. 29절에 섬겨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그 단어가 둘류오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둘로스라는 단어와 뿌리가 같은 단어로 종으로 섬기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큰 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열심히 아버지 말을 듣고 순종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거기에는 아들로서의 책임과 의무와 감사에서 격발된 성실이 아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종으로서의 위장된 성실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건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가진 어떤 것을 얻어내기 위한 포장된 악이었던 것입니다.

그 렇다면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드리지 못하고 아버지의 곁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허랑방탕하게 살았던 둘째와 아버지 곁에는 있었지만, 역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며, 단지 아버지의 소유가 탐이 나서 열심을 부린 첫째와 뭐가 다릅니까? 큰 아들이 자기 동생을 환대하는 아버지께 화를 내며, 저렇게 재산을 탕진한 자에게 양이 웬 말이냐고 대들지요? 그 말은 자기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는 말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큰 아들은 속으로 작은 아들이 부러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산 때문에 참은 것입니다. 뭐가 다릅니까? 둘 다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탕자인 것입니다. 오히려 둘째가 훨씬 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아요? 둘째는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종으로 살아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그런 자식입니다.’하고 아버지를 찾아오는데, 첫째는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큰 아들입니다.’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종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더 나아요?

 

(15:15)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보 세요. 종은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도덕적 윤리적 선한 행위가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지 못했음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착하게 살던 큰 아들이 결국 마을 사람들과 가족들 앞에서 아버지를 심하게 모독을 했음을 간과하시면 안 됩니다. 둘째가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나가 전부 탕진을 한 일이나 큰 아들이 사람들 앞에서 잔치를 베푼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모욕하고 아버지께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 것은 하늘의 관점에서 동일한 죄란 말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 진심으로 아버지의 소중함을 자각하여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그런 자녀들을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하 버드와 예일의 교수자리를 버리고 장애인 공동체에서 평생 장애인들의 기저귀를 갈다가 간 헨리 나우엔과 도끼로 무고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나중에 하나님께로 돌아온 살인마 김대두가 천국에서 차등 있는 대우를 받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아버지만 의지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 딱 그거 한 가지입니다.

 

우 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잃어버렸다 되찾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처음에 소유한 적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잃어버리지요.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세전에 택함을 받고, 영원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완성이 된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잠시 이방 나라로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잃어버림을 자취하신 것입니다. 왜요? 우리 성도들에게 잃어버린 자들의 삶이 돼지우리 속에서의 쥐엄 열매 다툼과 같은 처절한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셔서 다시는 아버지를 떠나지 않게 하시려고 잃어버림을 자취하셨던 것입니다. 그 잃어버렸던 자들이 하나님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떠나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고, 이렇게 처참하게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저는 아버지가 지금 당장이라도 지옥에 들어가라 하셔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티끌 같은 존재입니다. 부디 저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하고 항복하고 돌아오는 것이 이역사와 우주가 존재하는 목적인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종의 자리도 감지덕지 한 자입니다.’라는 겸손의 고백이 우리 안에서 진심으로 터져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걸 배우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 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티끌 됨이나, 종 됨을 자각하는 것 이전에 우리의 열심과 노력으로 뭔가 업적을 쌓아서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려는 왜곡된 성실을 내어놓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 또한 자기중심의 자아 숭배 교에서 벗어나지 못한 악한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나오는 성실한 행위가 진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에서 나오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 잘 보여서 뭔가 떡고물을 챙기려 하는 위장된 성실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아세요?

여러분이 행한 그 일을 아무도 안 알아주었을 때 여러분 마음이 어땠는지 생각해 보세요?

섭 섭하셨습니까? 괜한 헛수고 했다는 생각 안 드셨어요? 그게 큰 아들입니다. 작은 아들보다 더 나쁜 큰 아들이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근사한 종교행위나 성실한 구제나 봉사, 힘에 지나는 헌금, 건강을 해칠 만큼의 기도생활, 이런 것들에 감격을 하고 감탄을 한단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이 큰 아들의 모습, 종의 삶일 수 있다는 것을 절대 간과 하지 마세요.

아 버지의 것으로 허랑방탕하게 창기들과 놀아난 둘째를 오늘 날 도덕과 윤리로 평가를 하면 어떤 평가가 나옵니까? 죽일 놈입니다. 반대로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의 밭에서, 아버지의 일을 도와 죽도록 일한 큰 아들은 오늘 날 도덕과 윤리로 평가할 때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효자 상이라도 주어야지요.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 놓은 도덕과 윤리는 그 두 아들을 그렇게 극명하게 대척점으로 몰아 완전히 반대의 평가를 내릴지 몰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둘 다 죽일 놈이면서, 둘 다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어 떠세요? 이 시점에서 우리의 삶을 한 번 돌아보자고요. 우리의 삶은 정확하게 둘째 아들과 큰 아들의 삶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 형국 아닌가요? 그렇다면 우리는 도저히 불가능 한 존재 들 입니까? 여러분이 잊지 마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결론이 없다는 것입니다.

 

(15:31-32)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큰 아들이 아버지가 베풀어 놓은 그 잔치에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 비유의 결론이 독자에게 넘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이 누가복음 15장은 전체가 다 잃었다가 찾아진 존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결론에서 큰 아들만 버려진다면 이야기의 일관성이 없잖아요? 게다가 아버지는 28절에서 성령의 초청을 연상시키는 파라칼레오라는 단어를 써서 큰 아들을 잔치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악한 큰 아들이 하나님의 잔치로 초청을 받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백에서 십으로, 십에서 둘로, 둘에서 하나로, 결국 그 하나도 하나님의 은혜와 열심 앞에서는 하나님의 잔치 집으로 돌아 올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예수님은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그 비유의 청자들, 사마리아의 세리들, 창기들, 죄인들, 예수님의 제자들, 유대의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그들 모두는 아버지를 버리고 뛰쳐나간 둘째 아들이요, 아버지에게 노하여 자기 동생을 당신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자기에게 보상을 해 주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큰 아들인 것입니다. ‘너희들 모두에게 구원의 길은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는 그만큼 큰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큰 은혜 앞에서 지금 누가 누구를 가리켜 죄인이라 하고, 창녀라 부르고, 세리라 얕보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하면 전부 죽은 흙에 불과한 자들입니다. 우리의 성숙이나, 우리 안에서 나오는 모든 선한 행위도 전부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누구도 다른 누구를 정죄하거나 판단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첫 번째 잃은 양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시지요?

 

(15:7)

15: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하 나님은 회개할 것 없는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하신답니다. 그 말은 이미 회개한 사람들보다 나중에 회개하고 돌아 온 사람이 더 가치가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서기관들처럼, 유대주의와 헛된 종교적 열심에 빠져 있는 사람들처럼, 마치 자신들은 회개할 것이 없는 자로 여기고 다른 이들의 잘못이나 흠을 찾아내고 정죄하는 데에 힘을 쓰는 이들은 절대 하나님의 기쁨의 잔치 자리에 못 들어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래서 6절을 보면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와서 이웃과 가족들을 초청 해다가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양 한 마리 찾았다고 다른 양들을 잡아 잔치를 벌이는 게 이해가 가세요? 이렇게 찾아진 양과 잡혀 죽는 양이 구분이 되어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소중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잃었다 찾은 양이십니까? 아니면 찾은 양의 잔치에 쓰일 소품용 양입니까?

 

이 렇게 가장 악한 큰 아들까지도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을 입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진짜 큰 아들이 창기와 함께 아버지의 것을 허비하고 있는 동생들을 찾아서 이 땅에 내려와 그들의 삶의 실체를 바로 보게 하시고, 돌에 맞아 죽어야 할 그들의 죽음을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그들을 아버지께로 돌려보내시는 하늘의 장자 역할을 잘 해내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런데 성경은 우리 성도의 교회를 가리켜 장자들의 총회라 부릅니다. 우리는 어떤 장자가 되어야 합니까? 다른 이들이 나보다 더 칭찬을 받고, 나보다 더 인기가 있고, 나보다 더 우대를 받는 것이 화가 나고, 분이 나서 분열과 다툼을 초래하여, 아버지를 가슴 아프게 하는 장자이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길을 잃고 연약한 상태로 돼지우리에 머물고 있는 내 형제가 안쓰러워 그 형제들을 위해 내가 도리어 낮아지고, 내가 도리어 그들의 발을 씻기며, 내가 도리어 그들을 위해 죽을 준비를 하는 진짜 장자들이 되어야겠습니까?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병 원에는 의원병(iatrogenic)이라는 것이 있지요? 헬라어로 의사를 가리키는 이아트로스라는 단어에 원인이라는 뜻이 ‘genic’이 붙어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지병을 치료하러 갔다가 치료과정 중에 더 심한 병에 걸리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경건과 성숙을 지향하는 교회에는 경건 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걸 자기 의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까지 잔치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이 중에도 경건 병에 걸리신 분들이 꽤 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서 어서 말씀으로 치료 받으시고 오직 아버지의 은혜 앞에 납작 엎드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자리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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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유7.소금과 빛 (마5:13~16)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 이니라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
    Category이번주 설교원고 Byseoulsmyrna Views13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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