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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1) 로마서 개관

 

(1:1)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오늘부터 로마서를 함께 공부하겠습니다. 로마서는 아주 짧은 책입니다. 마음먹고 읽으면 30분이면 정독을 할 수 있는 그런 책입니다. 그러나 2,000년 교회사가 내어놓은 로마서에 대한 주석은 그 어떤 책보다 방대한 분량입니다. 아마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의 주석과 강해를 보유하고 있는 책이 로마서일 것입니다. 제 방에도 그 동안에 공부한 로마서에 대한 주석이나 논문, 참고 도서만 50권 가량이 됩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로마서 1장에 관해서만 500페이지를 할애하여 책을 쓰셨을 정도로 로마서는 그 안에 심오하고 방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중요한 것은 로마서 안에 방대하게 숨어 있는 메시지가 전부 복음에 관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과 루터를 비롯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이 로마서를 통해 회심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로마서의 저자는 바울입니다. 바울에 관해서는 제가 다음 시간에 자세하게 보충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 로마서의 원 수신자는 로마 교회입니다. 로마 교회가 정확하게 언제 생겨났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유세비우스(Eusebius)를 비롯한 초대 교부들은 글라우디오 황제 때 베드로가 로마로 건너가 교회를 개척했다고 주장하지만 그 사실을 뒷받침할만한 아무런 근거나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오순절 성령 강림 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로마 출신 예루살렘 순례자들에 의해 로마 교회가 생겨났을 것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바울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는 부부를 만나 귀한 사역을 함께 하는데 그들이 바로 로마 교회 교인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로마의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에 의해 고린도로 피난을 온 사람들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울을 만났을 때 이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이렇게 로마 교회는 로마서가 기록되기 훨씬 이전부터 로마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로마서의 내용을 보면 이미 로마서가 기록될 즈음에는 많은 이들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고 있던 교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로마서를 고린도 교회에서 썼습니다. 16장에 보면 바울이 이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고린도교회 교인인 뵈뵈(Phoebe)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 편지를 쓸 때 거했던 집 주인의 이름이 가이오라고 기록이 되어 있지요? ‘가이오가 문안한다

그 가이오는 고린도전서 114절에 나오는 인물인데,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 바울에 의해 전도를 받고 회심을 한 인물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고린도 지역의 재무관이었던 에라스도의 문안도 있는 것으로 보아 로마서는 고린도에서 기록이 된 것이 맞습니다. 1929년에 발견된 고린도 지역의 비문에서 당시 고린도 지역의 재무관이었으며, 공회당의 관장이었던 에라스도의 이름이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과 정황으로 보아 로마서는 AD57-58년 어간에 고린도에서 기록이 된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바울은 AD52년 봄에 가이사랴와 예루살렘에 가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안디옥에서 겨울을 보냈습니다. 그 후 AD53년에 에베소로 가서 3년간 목회를 합니다. 그리고 AD57년 말기에 고린도에서 석 달간을 보냅니다.(20:3) 사도행전 2016절을 보면 바울이 그 다음 해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힘을 썼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따라서 바울은 58년 봄 오순절 이전 고린도에 머물 때 이 로마서를 쓴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이 로마서를 로마 교회에 전달한 것일까? 로마서 15장을 보면 바울은 그의 에베소 목회가 2년 이상 계속되고 그 성과가 주변 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선교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필요성을 느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5:22~24)

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바울은 로마에 가는 것이 그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로마를 지나 스페인 지역까지 가기를 원했습니다. 따라서 안디옥 교회와 같은 전도 활동 기지가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당시 땅 끝이라고 여겨졌던 스페인으로 전도를 하러 가기 위해 로마 교회를 잘 교육하고 훈련시켜서 전도 활동 기지로 사용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24절에 보면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라고 기록이 되어 있지요? 로마 교회를 선교의 근거지로 삼아 땅끝으로 가려했던 사도의 심중이 그대로 노출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20여 년간 가르쳐왔던 복음을 로마 교회에 자세하게 설명을 함으로 해서 그들을 자신의 사역에 동참토록 준비시키려는 의도에서 로마서를 썼던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1530절 이하에 보면 사도바울이 로마로 가기 전에 먼저 유대를 방문할 것이라고 하면서 불길한 징조를 예감한 듯 로마 교회에 기도 부탁을 합니다.

(15:30-31)

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31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 직하게 하고

결국 바울은 로마 교회에 가지 못하고 사슬에 묶인 죄인이 되어 로마로 향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의 불길한 일을 예감하고 혹시 자기가 어떻게 되더라도 로마 교회가 자신의 유지를 따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복음의 중심이 되어주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거의 유언장처럼 비장한 마음으로 이 편지를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마치 유언장을 쓰듯 장엄하게, 복음의 핵심을 목숨 걸고 총력을 기울여 기록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로마는 바울의 사후에, 로마가 전쟁용으로 구축해 놓은 2,800km에 달하는 비아 아피아(via apia)를 통해 복음을 세계로 흘려보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의 수도라 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아 아피아(via apia)가 잘 발달 되어 있었습니다. 그 도로로는 전투용 전차 두 대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길이었습니다. 그길로 바로 사도 바울이 자신의 피를 짜서 기록을 한 이 로마서의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신묘막측하지요?

 

이 로마서의 핵심 단어를 세 가지로 추리면 (디카이오오), 구속(아폴리트로시스), 화목 제물(힐라스테리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서를 공부하는 내내 그 하나님의 의성도의 구속화목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확실하게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먼저 이 로마서가 어떤 구조로 구속화목 제물이라는 중요 주제를 설명하고 있는지 로마서의 전체 구조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자신을,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입은 사도로 소개하면서, 사도가 전할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1:2)는 말로 시작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전개될 사도의 복음의 핵심은 약속을 따라 세상에 오신 아들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전체를 꾹 짜서 한 덩어리로 만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야기입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16)고 말합니다. 117절에서는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 될 수 있는 것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인간을 의롭게 하기 때문에 누구든 하나님의 의를 믿는 자는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이야기를 321절에서 한 번 더 반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왜 인간들에게는 자신들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지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을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믿는 자는 자신이 불의한 존재이고 하나님의 심판이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순순히 자신의 불의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여 자기 스스로도 의를 행할 수 있다고 여기는 교만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에 대해 하늘로부터 나타난다는 것을 말하고(1:18) 왜 세상의 모든 인간이 불의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말합니다(1:18-31). 즉 사도는 하나님의 의가 구원의 능력이 됨을 선포하고,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의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말하기 위해 모든 인간을 불의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 후, 결국 하나님의 진노는 불의한 세상에 대한 정당한 조치임을 설명합니다(2:5-8).

 

아울러 인간의 불의함은 유대인의 율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자세하게 기록을 해 나갑니다. 이방인들은 양심이 있는 자로 죄를 범하는 존재들이고 유대인들은 율법이 있는 자로 죄를 범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도 이방인과 다를 바 없이 하나님의 진노에 속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2:12절부터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4절에서 사람은 다 거짓되다는 선언을 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으며(3:9), 따라서 세상에 의인은 없고 오직 죄인만 있을 뿐임을 3:10-18에서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3:19-20까지에서 유대인들이 율법을 오해했음을 말합니다. 로마 교회의 구성원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지만 그 속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꽤 있었거든요.

사도는 율법이 인간의 입을 막고 온 세상이 심판 아래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한 기능으로 주어진 것이지 인간을 의롭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그리고 다시 117절에서 선포했던,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의 의에 대해 말하고, 그 의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을 3:21-31에서 확언합니다. 이것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거기에 대한 예로 4장에서는 유대인들의 위대한 조상인 아브라함을 얘기하면서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지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잘 해서 그 대가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저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의로운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5장에서는 하나님의 의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말합니다. 즉 믿음으로 의로워진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5장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5:1). 모든 인간은 그들의 불의함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화평이 깨어진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의가되심으로 그 의를 믿는 믿음의 사람에게는 하나님과의 화평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신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할 수 있으며, 믿음으로 인해서 환난 중에서도 인내하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5:2-4). 이것은 법의 세계가 아닌 놀라운 은혜의 세계입니다. 이 은혜의 세계를 가능하게 한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신자는 예수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히 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은혜는 인간의 불의와 죄의 현장에서 더욱 풍성히 드러나게 됩니다(5:20). 그래서 사도는 한 사람으로 인해서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그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으며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르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그 5장 후반부의 단락을 시작하는 것입니다(5:12). 사도는 이렇게 반복하여 인간의 죄를 지적하고 설명을 합니다.

 

우리가 주의해서 읽어야 할 것은, 사도가 앞부분에서 죄를 말하는 것은, 왜 인간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인가를 말하기 위해서이고, 5장에서 다시 죄에 대해 언급하면서 모든 인간이 사망에 이르렀음을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가 은혜의 풍성을 드러낸다고 해서 고의로 죄에 거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6:1). 왜냐하면 하나님과 화목 된 관계에 있는 신자는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산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6:11). 하나님에 대해 산 자들은 더 이상 자신의 행위와 업적과 공로에 가치를 두지 않게 되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의 유무나 다소에 따라 은혜가 더 많이 부어지거나 적게 부어진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하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산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흙임을 자각해가는 과정 속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며 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들어가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6:13). 물론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일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비유 마지막 강해 때 자세하게 설명해 드렸지요?

 

사도는 신자가 더 이상 죄에 매이지 말아야 하는 것을 7장에서 남편이 죽어서 다른 남자에게 시집간 여인으로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즉 신자는 죄로부터 해방되어 예수께 속한 자로서, 죄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는 존재라는 것입니다(7:4).

노파심에서 말씀 드립니다만 성경에서의 죄란 단순히 사건화 된 도덕적 윤리적 사회법적 위반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지어진 인간이 자기주장, 자아 숭배, 자아실현, 자아확장의 삶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죄에서 해방이 된다는 것은 자아 숭배에서 해방이 되어 자기 부인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에게서 여전히 죄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실존적 경험을 통해서도 이미 증명이 된 것이죠. 그렇게 죄의 세력은 신자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즉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존재가 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도 여전히 죄 가운데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가 7장에서 다시 죄를 언급하는 것은, 믿음이 있는 신자의 안에서 여전히 죄가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는 실상을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6장까지 에서는 인류의 보편적인 죄에 대한 지적과 하나님의 은혜라는 해결책에 관한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7장은 이미 죄의 문제에서 해결을 받았다고 하는 신자들 안에서 꿈틀대는 죄의 문제에 대한 기술인 것입니다. 사도는 7:15-23에서 마음은 선을 원하는데 원하는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것이 신자의 실상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실존적, 경험적 모습 아닙니까?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불가능하며 추악한 죄인인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이러한 자기 실상을 보게 하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는 고백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고백과 함께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바로 그 자리가 죄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자리인 것입니다. 자신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필연성을 자각하고 그 은혜를 의지하게 되는 그 상태가 바로 하나님 의존의 상태니까요.

 

이처럼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은 자신이 죄로 인해 죽은 자임을 실감하는 현장에서 생생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8:1)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이 죄로 인해 죽은 자임을 실감할 때 선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가 죄를 언급할 때마다 그 의미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가 죄를 언급하는 것은 단지 인간은 죄인이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가 어떤 것이며,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때그때 죄에 대해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 된 관계에 있게 되었지만, 문제는 여전히 죄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육신에 이끌려 육신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길을 스스로의 힘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 측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을 보내십니다. 성령이 함께 함으로써 육신의 생각이 아니라 영의 생각으로 살게 하시고 하나님의 의에 소망을 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8:9)고 말합니다.

신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보내셔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8:15). 또한 그 사랑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됩니다(8:17). 그러나 고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현재의 고난이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8:18). 오직 성도만이 고난을 영광의 전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성령에 의해서.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신자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그 어떤 것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그리스도로 기뻐하게 됩니다(8:39).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한 신자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에 있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교리가 등장합니다. 이러한 신자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선택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의한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9:13)고 하신 것처럼 이미 작정된 일입니다. 인간의 자질과 조건, 그리고 인간 측에서 내어 놓은 선을 따라 택하신 것도 아니고 자녀로 삼으신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에 대해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반문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에 가는 것이 마땅한 자를 지옥 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불의한 존재이지만 그 안에 택한 자가 있고 그들을 세워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의 풍성함을 드러내는 그릇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 그릇이 하나님이 택한 남은 자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방인 중에도 있습니다(9:20-28).

 

이처럼 신자는 이미 나기도 전에 택하심을 따라 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신자 됨에 대해서도 자기 의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다만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9:15). 이처럼 신자는 끝까지 자신의 공로를 내세울 수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그분의 속성과 하신 일을 드러내는 그릇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격발이 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신자가 자기의 업적과 공로를 스스로 챙겨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신자의 믿음을 가리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그 진술은 두 가지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인데, 그 하나가 신자의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와 실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능력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신자의 믿음이 어떻게 현상 화 되어 나타나는가, 입니다. 사람들이 첫 번째 메시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데 두 번째 메시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신자 안에 들어 있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고 그 선물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실상이나 증거로 현상 화되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쉽게 말해서 눈에 보이는 업적이나 공로나 열심 등으로 사람들의 믿음을 판단하거나 판별할 수가 없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기도를 저렇게 많이 하니까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는 둥, 저 사람은 저렇게 착하게 살기 때문에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는 식의 판단을 인간 측에서 내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려는 사람들이 그 믿음을 사용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얻어내려 하는 엉터리 신자들인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와 십자가의 필연성 앞에 납작 엎드려 항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오심과 그분이 지신 십자가는 누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가려내는 하나님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고 여겼지만, 사실 하나님의 백성은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라 이삭, 즉 하나님의 약속으로 선택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10장에서 아주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민족적 이스라엘은 하나의 모형일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민족 자체가 훌륭하고 사랑받을만해서 선택이 된 것이 아니라 이삭의 후손, 즉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선택이 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모형으로 이스라엘이 선택이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의해 선택이 되어 모형으로 쓰여진 이스라엘이 복음 앞에서 버려지는 일이 생기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을 모두 버렸다는 것은 아닙니다(11:1). 이스라엘 안에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습니다(11:4). 이 부분을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민족적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해석을 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건 정말 큰 오해입니다. 그 말씀은 이스라엘 안에도 남은 자가 있어서 이스라엘이 전부 집단적 유기의 상태에 던져진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방인 가운데도 역시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1:5). 그런데 누가 하나님이 택하신 참된 백성이냐는 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증거 됩니다(10:13).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자기 영광을 추구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성령에 의해 자기의 이름을 잃어 버린 자들, 즉 자기부인의 과정을 통과하게 되는 자들이 자기 이름이 아닌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속으로 난 여전히 이렇게 내 이름을 부르며, 내 이름을 위해서만 살고 있고, 나의 영광만을 위해 살고 있는데, 그럼 난 가짜인가?’하고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만 부르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것은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목적지를 향해 한발 한 발 인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부인의 삶인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왜 주님이 구원의 능력일 수밖에 없는가를 알았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택한 남은 자이고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한 참된 백성입니다.

 

이제 신자는 하나님의 의로 구원 받은 자로써 의의 정신을 세상에 나타내야 합니다. 그것이 이웃 사랑이고 그것을 몸으로 드리는 산제사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12장 전체의 내용입니다. 사도는 12장 전체에서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어떤 삶으로 지향되어 지는 지에 관해 설명을 합니다. 새 마음으로 사는 새사람은 성령으로 사는 삶을 지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성도가 사회와 정부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줍니다. 성도는 사회나 정부나 개인에 대해 친히 원수 갚아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12:19)

그게 바로 성령 받은 자에게서 서서히, 그러나 필연적으로 격발이 되게 되는 성경적 의미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자신만을 향해 있던 사랑을 자기부인의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놓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과 이웃에게로 방향전환이 되어 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자기 밖으로 향하는 사랑이 신자에게서 나타나야 할 믿음의 열매이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그게 13장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이러한 믿음과 사랑 안에서 서로 문안하는 관계임을 말하는 것으로 로마서를 끝내고 있습니다.

 

어떠세요? 로마서 안에 복음의 핵심 교리와 성도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모두 나와 있지요? 우리는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과 그 사랑을 알게 된 자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에 대해서 자세하게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말세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깊이 자성하는 시간도 될 것입니다.

 

제가 사실 로마서를 설교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를 했었습니다. 벌써 몇 년이 되었지만 이미 새벽 예배 때에 로마서를 한 차례 강해를 했고 그 뒤에도 로마서를 설교 예화로 많이 인용해서 써왔기 때문에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사실 조금 흥분되기도 했었습니다. 제일 자신 있는 게 로마서였거든요. 그런데 정작 로마서를 정식으로 강해를 하리라고 마음을 먹고 다시 집중적으로 공부를 하다 보니 그동안 제가 공부하고 설교했던 로마서가 너무 가난하고 비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로마서 강해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설교 준비를 하는 시간 외에 틈틈이 예전에 여러 차례 읽었던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 전권을 다시 한 번 다 읽어 보기도 했고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와 칼 바르트의 로마서, 루터와 칼빈의 책들, 심지어 크리소스톰의 로마서 주해까지 다시 한 번 반복하여 열심히 읽어 보았지만 성에 차지가 않았습니다. 주제가 너무 산만하다고 표현을 해야 하나요? 아무튼 조금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냥 제 식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큰 기둥으로 삼아 성경 신학적 해석을 바탕으로 풀어가기로 하고 그 책들을 전부 덮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한국과 홍콩 집회의 자투리 시간에 로마서를 여러 번 정독을 하면서 다시금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과 은혜의 깊이를 되짚어 볼 수 있었습니다.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로마서 전체 구조를 그 은혜 속에서 다시 펼쳐보니 어떻게 설교해야 할 것인가가 가슴 속에서 그려지는 것 같았습니다. 궁금하시죠? 이제부터 따분한 교리의 총합인 것처럼 보이는 로마서를 할 수 있는 한 쉽고 명료하게 설명을 해 나갈 테니까 여러분도 너무 부담을 갖지 마시고 좇아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로마서를 공부하는 데에 유용한 간단한 그림을 여러분의 머릿속에 그려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제가 그렇게 홍콩에서 한국에서, 어떻게 하면 로마서 첫 번째 시간에 로마서 전체의 내용을 간단히 축약하여 우리 교우들의 가슴에 심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떠 오른 영화가 있었습니다. 몇 년 전에 개봉했던 그해 여름이라는 영화였습니다. 가능하시면 오늘 집에 돌아가시다가 하나씩 빌려다가 가족들과 함께 보세요. 평소에 친분이 있는 감독이 새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봤다가 정말 큰 감명을 받았던 영화입니다.

이병헌과 수애라는 배우가 아주 열연을 했던 그런 영화인데 그 내용 안에 끊임없이 숨어서 우리에게 사랑을 퍼 부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베드로처럼 요리조리 도망만 다니다가 결국 그 사랑의 힘 앞에서 항복을 하고야 마는 우리의 모습이 그 속에 잘 나타나 있어서 저는 개인적으로 아주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대충 줄거리를 이야기하면,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이 최절정에 이르는 1969년을 배경으로 대학을 다니던 부잣집 아들 윤석영(이병헌 분)이 여름방학 때 농촌 봉사활동을 가서 그 마을 도서관 사서로 있는 서정인(수애 분)을 만나면서 서로 사랑이 싹튼다는 내용입니다.

약 열흘 동안 머물면서 서정인과의 추억을 쌓아가는 중에 윤석영이는 서정인의 사정에 대해 알게 됩니다. 과거에 서정인의 부모님이 마을에 도서관을 만들어서 마을 사람들의 교화에 힘썼으나 월북을 해버리는 바람에 그 마을 전체에 피해를 입히게 되고 서정인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여전히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서정인은 바로 그 도서관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농활의 마지막 날 밤에 대학생들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영화를 상영해 주고, 그 와중에 마을 도서관이 불에 타 버리면서 서정인은 윤석영을 따라 서울로 가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대학생과 농촌 처녀의 그렇고 그런 사랑 이야기인데, 그 후 사건이 급반전됩니다.

일단 윤석영은 서정인과 함께 자신이 다니는 대학 교정으로 가서 서정인에게 자신의 가방을 맡기고 학생회 사무실로 올라가는데, 학생회 측에서는 박정희 3선 개헌반대 집회를 개최하고, 윤석영과 서정인은 이 데모에 휩싸이게 되면서 서정인이 경찰서로 연행이 되고, 윤석영도 연행이 됩니다.

문제는, 서정인이 월북을 한 부모님(연좌제) 때문에 사상을 의심받게 되고, 서정인이 들고 있던 윤석영의 가방 때문에 윤석영도 간첩 혐의로 의심을 받게 되면서 폭력과 협박에 의한 취조가 진행되는데, 윤석영의 아버지는 윤석영에게 서정인을 모르는 여자라고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거든요. 경찰관의 심문에 윤석영은 서정인을 모르는 여자라고 부인을 합니다. 그러자 경찰관은 윤석영을 서정인의 취조실로 데려가서 대질 심문을 합니다. 서정인은 윤석영을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으로 쳐다보는데, 윤석영은 자신이 살려고(당시 시대 상황에서 간첩 혐의가 인정되면 최대 사형, 최소 몇 년은 징역살이를 하여야 합니다) 서정인을 모르는 여자라고 부인해 버립니다.

서정인은 결국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도 윤석영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여 윤석영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결과 윤석영은 바로 석방이 되고, 서정인은 감옥에서 징역살이를 하는데, 윤석영은 사랑하는 여자, 서정인을 부인하였다는, 버렸다는 죄책감에 아버지에게 부탁을 하여 서정인을 석방시키고, 이제는 절대 서정인과 떨어지지 말자며 무작정 기차를 타고 둘이서 떠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대기실에서 윤석영이 약을 사러 간 사이 서정인은 홀연히 떠나게 되고, 윤석영은 이 서정인을 찾아 36년 동안 전국을 헤매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독신으로 대학 교수를 하며 지냅니다. 그러다가 방송국에 다니는 제자를 통하여 편백나무 잎으로 만든 카드를 보고, 서정인의 행적을 추적하여 서정인이 자신과 헤어진 후의 행적을 알게 됩니다. 물론 서정인은 죽었죠. 그리고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처음에 이 영화를 봤을 때에는 뭔가 씁쓸한 여운이 남았었습니다. 생존의 법칙 아래에서는 사랑의 힘도 무용지물이 되더라는 그런 아쉬움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까 그렇게 생존의 법칙 아래에서 산산이 부서져버린 인간의 사랑 맞은편에서 그 초라하고 연약한 모습까지도 품어 안고 사랑해 주는 진짜 사랑이 그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물론 이건 저의 추론일 뿐입니다. 인간에게서는 그런 사랑이 나올 수 없는 거니까요.

저는 취조실에서 서정인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윤석영의 모습과 베드로가 대 제사장의 뜰 안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모습과 오버랩시켜 보았습니다.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습니다. 윤석영은 서정인을 사랑한다고 자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잡고 서울로 올라왔던 것이거든요. 윤석영이가 농활이 끝난 후 서정인과 헤어져 기차를 타고 가다가 다시 내려 서정인을 찾아왔을 때의 그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네요. 너무 아름다운 사랑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남자의 모습이 취조실에서는 자신이 살기위해 사랑한다던 여인을 부인하는 모습으로 바뀌더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꼭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예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육신적 유익 앞에서는 수시로 예수를 부인하고 있지는 않나요? 좋을 때는 예수님의 손을 잡고 그 볼에 입을 맞추며 영원히 함께 할 것같이 너스레를 떨다가 정작 자신의 안위에 위해가 되는 일이 닥치면 언제든지 예수를 부인할 준비가 되어 있는 우리 자신. 그렇게 저나 여러분이나 윤석영이나 베드로나 다 같은 부류인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어떻게 다시 예수님을 믿게 되었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에 주어진 성령의 역사와 예수님의 기도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평생 그 흔적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진짜 사랑이 격발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어떤 짓을 했는가가 확실하게 자각이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사랑을 부어 주셨는지를 알게 되었을 때에 진짜 사랑이 격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내내 인간의 죄를 그렇게 집요하게 물고 들어지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께 무슨 일을 했는지 알라는 것이지요. 윤석영이 서정인의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가 그녀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고 배려했는지 알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윤석영은 그 서정인을 가슴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건 평생을 간직해오던 그리움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사랑을 우리가 로마서를 통하여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무력함과 신랑이신 예수의 집요한 사랑.

 

저는 그 영화 속의 편백나무 잎 카드를 보면서 바로 그 예수님의 집요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서정인은 그 편백나무 잎 카드가 언젠가 자신이 사랑하는 윤석영에게 전달되어질 것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시골에서 윤석영이와 서정인이 그 편백나무 잎 카드를 만들며 이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이 편백나무 잎 편지는, 나 잘있어요, 내 걱정하지 말아요, 나 행복해요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그 안에는 그만큼 난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메시지가 숨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러한 굳은 믿음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편백나무 잎 카드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자신의 사랑이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게 꼭 전달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담아서 계속 보내는 집요함. 그게 바로 우리 하나님의 사랑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카드는 결국 윤석영에게 전달이 되어졌습니다.

이미 사랑하심을 입은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언젠가는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당신을 부인하는 자리에까지 찾아오십니다. 그리고는 결국 우리에게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전해주시고 우리 안에서 당신을 향한 진짜 사랑을 격발해 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게 로마서 전체의 내용입니다. 부디 이 로마서를 통하여 마음으로 그리워하기만 하던 막연한 그 예수님이 진짜 사랑의 대상으로 여러분 각자에게서 고백이 되어 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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