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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8. 개와 돼지, 그리고 그들에게 던져진 거룩한 진주

  

(7:6)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오늘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에 들어 있는 짤막한 비유의 말씀인 개와 돼지의 비유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혹자들은 이 말씀을 곡해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복음을, 믿지 않는 이에게 던지게 되면 오히려 해를 입게 된다는 식으로 해석을 하는데, 그건 정말 얼토당토 한 해석이며 오히려 러면 전도를 어떻게 합니까? 전도는 믿지 않는 이에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입게 주님께서 언급하시는 개와 돼지 않않믿지 않않않앴않만D개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6장의 염려에 대한 교훈에서부터 출발을 해서 이해를 하면 훨씬 용이 합니다.

 

(6:25~34)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 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 하냐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 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 하니라

 

사람이 염려를 하기 시작한 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땅에서 축출을 당한 이후부터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서, 절대 순종의 자리에서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생명력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며 존재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쉽게 그림을 그려드리면 인간은 포도나무이신 하나님에게 접붙임을 받은 가지들처럼 줄기이신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존재하며 유지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존재 자체가 처음부터 집단적입니다. 인간은, 특히 하나님의 백성은 절대 개별성을 챙기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아니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머리로 한 집단적 존재, 거기에는 염려가 있을 수가 없지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순종의 자리에 내려가 있는 당신의 피조물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전능하신 알아서 부으시는데 무슨 염려가 있겠습니까? 나무가 튼실하면 가지는 아무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피조물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지의 자리를 벗어나, 선악과를 따먹은 뒤 스스로의 안전과 행복을 자기가 챙겨보겠노라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가지가 스스로 개별적인 포도나무가 되어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집단적 존재가 개별성을 챙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자기들이 선악의 판단의 주체가 되어, 자신들이 가치와 힘이라고 합의를 한,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것들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또한 그것들을 쟁취함으로 행복에 도달하려 시도를 좋은 재물과 인기와 건강과 도덕과 윤리 등이 그러한 것들입니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힘과 가치를 쟁취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하고, 열심히 공부도 하고, 열심히 아름다움을 가꾸고, 열심히 착한 일도 하고, 열심히 사기도 칩니다. 아무튼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욕심만큼 채워지지 않을 때 염려라는 것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염려는 자신의 영광 챙기기에 나선 타락한 개별자들에게 있어서 필연적으로 찾아오게 되는 것이며 개별자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름에서 오는 저주받은 감정인 것입니다. 그게 타락한 인간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창세전에 택해 놓으신 당신의 백성들을 그 인간의 나라에 계속 묻어두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그 인간의 나라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원래의 처음자리인 하나님에게 접붙임을 당한 집단적 존재로 회귀를 시켜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 역사 속에서 이 세상의 것으로 자신의 존재의 근거를 삼는다든지, 안전의 방책으로 삼는다든지, 행복의 조건으로 삼는 등의 타락한 나라의 존재방식에서 점점 벗어나게 되어 종국에는 모든 것을 다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사는 자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염려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자신의 존재의 근거와 가치의 근거를 포도나무이신 하나님에게만 두는 자로 완성이 되어져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현세적 형국을 설명하시는 산상수훈에다가 염려의 이야기를 집어넣으신 것입니다. 너희들은 세상의 힘과 가치로 너희들의 인기와 명성을 챙기고, 너희들의 안전과 행복을 챙기는 그런 세상 나라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 교회는 이제 세상의 힘과 가치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영광을 챙기는 이 세상 나라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로 경륜이 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더 이상 이 역사 속에서의 자신의 가치 챙기기나, 존재 챙기기, 착함 챙기기에 조바심 낼 필요가 없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세상의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으로 염려하는 것을 그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선악 판단에 의해 스스로의 안전과 행복을 챙기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드는 그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우리 스스로 착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삶을 추구하여 만들어 내려고 하는, 인간 측에서의 의를 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이 된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측에서 마련하신 의를 바울이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3:21~22)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러니까 율법은, 인간들 스스로 자신들의 자존심과 영광을 챙기는 수단으로서의 인간들의 의인 것이고,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의라는 것입니다. ‘너희들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여, 너희들의 착한 일로 스스로의 인기와 평판과 명성을 챙겨 하나님 앞에 공로와 업적으로 가져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지 않으면 그 누구도, 그 어떤 착함과 업적과 공로를 내어 놓을지라도, 지옥의 유황불을 모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주님의 말씀 속에 담긴 메시지입니다.

 

그렇게 여전히 이 세상의 힘과 권세로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챙기고, 스스로가 선악의 주체가 되어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열심에 의해 자신의 영광을 챙기려 하는 사람들로부터 필연적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비판입니다. 그래서 염려의 이야기 바로 다음에 비판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속해 있는 마태복음 71절 이하를 보세요.

 

(7:1~6)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 이니라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6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비판이라는 것은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게 된 타락한 인간들이 내어놓는, 자신들의 열심과 노력과 성과에 미치지 못하는 약하고 부족한 이들을 향한 독설이며, 자신들의 부족함을 감추고 스스로의 영광과 인기를 챙기기 위한 못난 개별자들의 폭력적 자구책입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의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신의 안전과 인기와 명성과 영광과 행복을 챙겨야 하기 때문에, 나 아닌 다른 이들이 나 자신보다 월등함을 소유하거나, 나 보다 더 잘난 자들이 나 자신에게 열등감을 주는 것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성취해 놓은 업적에 미달하는 이들에게 나 자신을 자랑하여, 나의 영광을 취하고 싶어 하는 것이 타락한 아담들의 본성이기 때문에, 자기보다 연약하고 모자란 사람들을 향해 폭력적 판단을 거침없이 퍼붓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비판의 본질입니다. 잘 새겨들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모든 비판을 금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지금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비판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성경 여러 군데에 거짓 선지자나 거짓된 말씀에 대한 비판과 분별을 촉구하며, 그렇게 한 자들을 칭찬하는 대목이 많이 있지 않아요? 따라서 성경이 금하는 비판이란, 자신의 영광을 챙기기 위한 인간 측의 선악 기준에 의한 비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무시하고 자신의 영광을 챙기려 하는, 타락한 아담 속에 들어있는 세상의 아담 군상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자신의 영광을 챙기기 위한 저주받을 비판밖에 할 줄 모르는 자들로 태어납니다. 거기에는 단 한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 섬기며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강간한 다윗이 나단의 이야기를 듣는 대목이 나옵니다. 어떤 부자가 자신의 양도 많은데 이웃의 가난한 자가 자식처럼 키우던 단 한 마리의 양을 빼앗아 요리를 하여 자기 손님을 대접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그런 놈은 당장 죽이고 양 새끼를 사배로 갚아주어야 한다고 노발대발합니다. 자기는 왕궁의 수많은 첩들이 있었음에도 충신의 아내를 강간하고 그것이 발각이 될까봐 충성된 장수를 죽여 버린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의 눈에 들어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겨우 티끌 같은 양 한 마리 빼앗아간 자에게 대노하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죄 성입니다. 그걸 자기 영광을 챙기기 위한 더러운 비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인간들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때 기준과 근거로 삼는 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율법을 모두 지켜내면 하나님 나라에 당당히 입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외에 하나님의 율법을 모두 지켜낼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율법은 자기를 죽여 원수를 살려내는 이웃사랑을 그 뿌리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피조물의 자리를 박차고 나간 인간들 중에 누가 그 사랑을 감히 흉내나 낼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오히려 이웃을 죽여 그 피로 자신의 배를 채워야 하는 좀비 같은 존재들인데, 어떻게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하늘의 사랑을 합니까? 그래서 그렇게 선한 율법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올인 하여 사는 인간들에게 주어지면 그 율법은 곧 자신의 훌륭함을 입증하고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데에만 쓰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그걸 지켜서 자신의 잘남을 입증해 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왜 인간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하나님의 의만을 의지 할 수밖에 없는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 뒤로 꼭꼭 숨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교만한 인간들은 최선을 다해 그 율법의 행위를 지켜내고 자신의 그 율법지킴을 근거로 다른 이들을 비판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의 잘남과 자신의 인기와 자신의 명성과 자신의 영광을 위해 열심을 다해 지켜내는 율법지킴과, 그것을 근거로 내질러지는 타인에 대한 비판을 가리켜 외식이라고 일갈을 하십니다.

 

(7:1~5)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 이니라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그렇지요? 다른 이들의 눈 속에 있는 티는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데 정작 자기 눈에 들어 있는 들보는 감지도 못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죄인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자이며, 얼마나 추악한 자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다른 이들의 약점이나 허점이나 티를 비판하여, 자신의 우월감과 영광을 챙기려 하는 이들이 바로 눈에 들보가 들어있는 자들이며, 그들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세상 나라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의만으로 통치가 되는 나라입니다. 거기에서는 개별적 업적이나 공로를 절대 인정해 주지 않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애초부터 집단적으로 구원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개별적 의나, 개별적 공로나 업적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거기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이 오롯이 드러나는 그런 곳입니다. 그곳에 사는 모든 이들은 전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면목 없고, 공로 없는 이들입니다. 그 나라에 어떻게 타인을 향한 비판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모든 인간들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18:11~12)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 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 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이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그가 어떤 사람이냐면 토색, 곧 욕심을 부리지도 않고, 불의, 부정직하지도 않으며, 간음을 하지도 않는 자입니다. 그리고 일 주 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십일조를 꼬박 꼬박 드리는 사람입니다.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너무나 깨끗하고, 성실하며, 훌륭한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뭐가 잘못입니까? 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찬을 받지 못하지요? 그가 한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리라는 자와의 비교 상대적 우월감을 누리고, 자신의 깨끗함과 종교적 열심을 자랑하기 위함에서 나온 것이라는 게 하나님의 노여움을 유발해 낸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자랑과 자신의 유익과 자신의 영광을 챙기기 위한 깨끗함과 종교적 열심은 반드시 다른 이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율법의 본질인 사랑과 은혜로 풀어내지 못하고, 자신을 자랑하고, 남을 비방하는 데에 쓰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비판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을 받는단 말입니다. 그게 너희가 하는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의 진의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토색, 불의, 간음 때문에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런 것은 티끌 같은 것입니다. 어차피 죄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통용이 되는 용어가 아닙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밧세바를 강간하고, 충신 우리야를 죽여 버리고서도 내가 하나님께만 범죄 하였다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시는 근거는 토색, 불의, 간음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라는 완악함입니다. 토색, 불의, 간음 등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큰 위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 분의 영광을 탈취하여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의 자기사랑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은 바로 인간의 자기사랑과 자기영광 챙기기입니다. 그게 들보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러한 들보를 끼운 채 티끌 같은 것들을 가리키며 치를 떤다는 말입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는데 정작 약대는 삼키고 있는 꼴입니다.

 

(4:11~12)

11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 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12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우리더러 그 들보를 빼라는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 눈에 들어있는 들보를 빼낼 수 있다면 우리는 자력구원을 이룰 수 있는 전능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들어 있는 그 들보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직후 인간들의 눈에 자리 잡은 것입니다.

 

(3:5~7)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자 선과 악을 스스로의 기준으로 판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타락한 인간의 밝아진 눈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이들을 가리켜 본다고 하는 자들은 소경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간 측에서는 자신들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되었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게 바로 눈이 먼 것이라고 반대로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게 인간들이 스스로의 기준으로 선과 악을 규정하고, 그것을 근거로 서로의 행위를 판단하고 비방하며, 그러한 것들을 잘 지키는 모습을 훌륭한 인간상으로 추앙하는 것 자체가 눈에 들보가 들어있는 자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외식하는 자이며, 그들이 바로 개와 돼지라는 것입니다.

 

이제 드디어 오늘 본문에 당도했습니다. 비판을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던 주님이 갑자기 개와 돼지의 이야기를 꺼내시면서 거룩한 것과 진주를 그들에게는 절대 주지 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에서 거룩한 것과 진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담은 은혜의 복음이며,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죄인들에게 전하러 오신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건 저의 추론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과 바로 밑에 붙어 있는 내용을 연결해서 보겠습니다.

 

(7:6~11)

6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7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 이니라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모두 줄 것이고, 찾아질 것이고, 열릴 것이랍니다. 개와 돼지들은 절대 거룩한 것과 진주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무리에게는 그 거룩한 것과 진주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반드시 그것을 주신답니다. 병행구절이 있는 누가복음으로 가서 그 거룩한 것과 진주가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11:9~13)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 이니라

11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3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거룩한 것과 진주가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나 열심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성령이 주어질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이 이야기의 핵심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신다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구하라의 구절들은 그 밑에 붙어 있는 황금 율이라 불리는 내용과 함께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7:12)

12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성령을 구하라, 그러면 줄 것이다, 라고 하신 주님께서 갑자기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어떤 내용을 연결시키시는데 그게 소위 황금 율, 기독교 윤리의 황금 같은 근본이라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으로 연결을 시키십니다. 이게 연결이 되세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앞의 원인과 뒤의 결과를 일관성과 통일성으로 연결을 하는 접속사입니다. 따라서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나오면 앞의 내용이 어떤 것이며, 뒤의 결론이 어떤 것인지를 먼저 잘 구별해야 합니다. 12절을 올바로 해석을 하기 위해 그러므로의 앞부분, 즉 원인의 부분을 찾아내야 하는데, 거기에 유용한 열쇄가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는 어구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말씀이 바로 율법이요 선지자라는 말씀인데, 그 율법과 선지자에 관한 내용이 본문 바로 앞인 마태복음 5장에 나옵니다.

 

(5:17~20)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 이로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는 중간에 내가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러 왔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그렇게 당신처럼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버리지 않고 행하며 가르치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제가 지난번에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 천국에서 큰 자는 누구밖에 없다고 했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율법을 다 행하시고 완성하셨으며 가르치셨습니다. 오직 그 분만이 큰 자입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율법지킴이라는 것을 근거로 한, 인간적 의로는 절대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천국백성들에게는 다른 의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다른 의가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그 은혜의 의를 전가 받은 자만이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여러 가지 행함에 대한 교훈을 쏟아 놓으십니다. 살인에 대한 교훈과, 간음에 대한 교훈, 이혼, 맹세, 원수사랑, 구제, 기도, 금식, 재물,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의, 염려, 비판, 그리고 거룩한 것과 진주를 구하는 문제 등을 나열하시고는, ‘그러므로로 결론을 맺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다.’

그러니까 앞에 장황하게 나열되어 있는 예수님의 명령이 모두 뭐라는 것입니까? 율법과 선지자에 의해 요구되었던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517절에서 그 율법과 선지자를 누가 완성하신다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 지켜내셨고 그 분이 지키셔서 완성하신 율법과 선지자를 우리에게 그대로 전가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이 남에게 대접 받기를 원하여 먼저 남을 대접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10:2~4)

2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

4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보시다시피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인간 측의 열심은 전부 헛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쉬운 말로 율법으로 의롭게 되던 시대를 예수가 종지부를 찍어 버리셨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열심히 율법을 지켜 자신의 의를 쌓는 시대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이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 하셨고 율법의 시대를 마치셨으니까요.

 

여러분, 그동안 517절 이후에 나오는 예수님의 교훈을 들으면서 참 마음이 무겁지 않으셨습니까?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음욕만 품어도 간음이고, 형제를 보고 밥통이라고 불러도 지옥 불에 떨어진답니다. 우리는 도저히 그 주님의 요구들을 지켜낼 재간이 없습니다. 어떻게 오른편 뺨을 때린 사람에게 왼편 뺨을 또 내 놓습니까? 어떻게 강제로 오리를 가자고 우기는 사람과 십리를 함께 가줍니까? 어떻게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합니까? 어떻게 하늘에만 재물을 쌓으면서 살며, 어떻게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으로 염려를 안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 세상 나라에 살면서 은혜로만 사는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며, 어떻게 우리를 부정하고 부인하는 하나님의 의만을 구하면서 살아요? 어떻게 비판을 안 하며, 어떻게 성령만 구하며 삽니까? 그게 다 율법과 선지자의 요구였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과 선지자는 모두 우리 측의 가능성을 기각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필연성을 주지시키고 확증하는 것입니다. 그 율법과 선지자를 예수가 다 이루시어 우리에게 거저 전가시켜 주셨습니다. 그게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신예수님의 일, 즉 율법과 선지자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황금 율은, 내가 남에게 대접받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대접해야 한다는 용의주도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건 이 세상에서도 비난을 받을 짓입니다. 그건 순수한 대접이 아니라 음흉한 보상과 반대급부를 전제한 불쾌한 대접이잖아요? 어떻게 대접을 받기 위해서 대접을 합니까? 그게 무슨 대접입니까? 그런데 율법과 선지자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키시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접해 주셨나요? 당신의 목숨을 끊어 우리의 죄를 도말하시고, 당신이 평생 지키신 완벽한 율법지킴의 삶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셨습니다. 그게 예수께서 완전케 하신 율법과 선지자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는 그 율법과 선지자를 이렇게도 표현을 합니다.

 

(22:36~40)

36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이니라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주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을 목숨 걸어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목숨을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느라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고, 당신의 몸처럼 원수를 사랑하느라 원수의 독배를 대신 마신 것입니다. 그게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대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과 선지자의 성취는 대접을 해 준 자들에게 대접을 받기 위한 성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어 놓아야 할 예수님에 대한 대접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다른 것 없습니다. 그냥 예수님의 은혜를 덥석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에 대한 대접입니다.

 

(10:45)

45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 이니라

 

이게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예수님의 대접이라면 우리가 주님께 내어 놓아야 할 대접은 이러한 것입니다.

 

(1:11~12)

11그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보시다시피 우리가 예수님에게 내어 놓아야 할 대접은 그 분의 은혜와 공로를 믿어드리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은혜를 전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나 우리의 공로를 전면 부인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원과 기대가 버려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대접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거부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야망과 세상 적 소원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그게 우리 주님에 대한 푸대접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우리를 먼저 대접하신 예수님에게 내어 놓아야 하는 대접은, 우리 자신의 모든 능력과 가능성과 행위를 전면 다 부인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온전한 생활양식입니다. 예수가 그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활양식을 이 세상에서 그대로 살다가 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신앙을 내려놓고, 예수에 대한 신앙으로 돌아서기로 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예수를 대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접은 한 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 완성되어져 가는 대접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힘을 기각하고, 하나님 이외의 것에 가 있던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자기부인의 삶이 우리 삶 속에 속속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에서의 정 떼기 과정이 모두 예수님을 향한 대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렇게 먼저 자기의 모든 능력과 가능성과 지혜를 부인하고 하나님이 부으시는 것으로만 살다가 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를 당신과 같은 삶을 사는 자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먼저 대접을 하시고 반드시 대접을 챙겨 가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남에게 대접을 받기 위해서 남을 대접한다.’라는 다소 엉뚱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우리를 낳고(대접하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낳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내 놓아야 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대접인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 성도를 창조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창조가 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역사와 인생 속에서, 그리고 육신 속에서 그리스도를 낳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여자인 교회가 예수를 낳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잘 새겨들으세요. 우리 성도들은 예수에 의해 영원 속에서 출산이 됩니다. 그러나 시간 속에서는 예수님의 은혜의 왕 노릇에 의해,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작은 예수로 성숙되어지고, 지어져 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리스도는 성도를 낳고 성도는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낳는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 먼저 하나님 백성 대접을 받은 자들은 예수님에게 믿음이라는 대접을 내어 놓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믿음은 전적인 신뢰요, 전적인 의뢰이며, 전적인 의존을 말합니다. 그렇게 예수 믿는 믿음이라는 것은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고 자신의 모든 행위와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점점 이 율법에 의해 모든 것이 판단이 되고 서열이 매겨지는 세상 나라가 아닌, 은혜에 의해 선악이 구별되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게 되는 것이고, 그 어떤 공로도 없이 선물로만 받게 되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율법에 의한 선악의 원리로 다른 이들을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자신들도 똑같은 마귀의 세간 노릇을 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성도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율법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영광과 인기를 위해,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수시로 폭로 당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제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폭로 당하면서 여전히 자신의 눈에 들보가 들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지금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종교행위와 착한 일과 율법 지킴의 행위를 근사하게 포장하여 하나님 앞에 자랑거리로 내어 놓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한 마디로 자신이 외식하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폭로에 의해 자신의 눈에 교활한 외식의 들보가 들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것을 들보가 빠졌다, 소경이 눈을 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들보가 빠지는 것은 우리 자신이 깨끗하고 순결하게 업그레이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눈에 들보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바로 그 지점으로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기부인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개와 돼지는 거룩한 것, 진주, 즉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게 왜 중요한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요즘은 애견인들이 많아서 실제로 개의 생일에 개에게 보석 목걸이를 선물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데, 개들이 그 보석의 귀중함을 압니까? 모릅니다. 같은 형국으로 개와 돼지들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보석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개와 돼지에게는 개와 돼지가 추구하는 행위와 율법이라는 또 다른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세상 나라가 최고이며,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신들의 의가 더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은혜라는 하나님 나라의 진주가 그들 앞에 떨어지면 그들은 자존심이 상해서 그 진주를 던진 이를 물어 뜯습니다. 그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던 자들에게, 그거 아니니까 회개하고 나를 믿으라고 했더니 자존심이 상해서 그 분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들이 개, 돼지라는 것입니다.

 

(49:20)

20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그런데 율법과 선지자를 예수가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개와 돼지에게 거룩한 것과 진주가 폭력적으로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성령과 함께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눈에서 들보가 빠진 자들이 되는 것이며, 그러한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비판밖에 할 줄 모르는 자들이며, 여전히 은혜라는 보석을 갖고도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모르는 개나 돼지라는 것을 자각하고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또 다시 은혜와 성령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반드시 주신다는 겁니다. 왜요? 이미 들어와 있으니까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의 의미를 확실하게 아시겠지요? 그렇게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우리 자신이 짐승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 개, 돼지의 습성은 우리 안에 남아서 수시로 우리를 개, 돼지로 살게 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것에 치를 떠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를 놓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꼭 붙드는 자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3:17~19)

17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18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19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 이로다

 

어떠세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목적을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자기가 짐승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 함이랍니다. 한 마디로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으면 개나 돼지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죽은 흙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주시는 믿음의 선물이 없이는 그걸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들 자신이 신이 되어 살고 있는 이 세상 나라에, 자신이 개나 돼지보다 못한 존재라는 자각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진짜 개이고, 그들이 진짜 돼지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개와 돼지들 중 한 무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졌습니다. 그 은혜 받은 개와 돼지들은 자신들의 원래 정체, 처음 자리가 개 와 돼지 같은 죽은 흙임을 절절하게 자각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남을 향한 비판이 있을까요? 아울러 다른 이들의 업신여김이나 무시 등이 그렇게 자존심 상하는 일로 여겨질까요?

 

여러분, 성도는 개와 돼지에서 멋진 슈퍼맨이나 배트맨으로 능력이 업그레이드되는 자가 아닙니다. 성도는 오히려 자신이 개와 돼지였고, 지금도 개와 돼지의 마귀 적 속성을 여전히 간직한 자라는 것을 올바로 자각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붙들고 겸손한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가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분명 거룩한 진주, 참된 하늘의 보석이 있는데 우리의 눈에는 들보가 끼어 있어서 그 보배를 더러운 돼지우리에 쳐 박아 버리는 삶을 수시로 살고 있음을 주님의 말씀 앞에서 폭로 당하세요. 그리고 여전한 나의 개, 돼지 됨에 통곡을 하십시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그대로 포기하지 마시고, 그 개와 돼지를 덮으시는 예수님의 풍성한 은혜의 장으로 나아가시란 말입니다. 제가 자꾸 개, 돼지 그러니까 기분 나쁘신가요?

 

(벧후2:22)

22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 하였도다

 

딱 우리 모습 아닙니까? 하늘의 의로 닦아주었다고 하는데도 또 자기가 싸 놓은 똥통으로 들어가 버리고, 진짜 하늘의 양식을 풍성하게 차려주어도 자기가 토해 놓은 더러운 세상의 힘을 주워 먹고 있는 우리 모습이잖아요. 그런데도 우리가 개, 돼지가 아니란 말입니까? 우리 좀 전에 전도서에서 읽었잖아요? 우리 인생의 목적은 우리가 짐승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그런 존재임을 확실하게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이지, 우리의 업적과 공로와 노력과 열심을 동원해 하나님의 환심을 사는 자가 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15:25~28)

25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니

28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성도는 자신이 개라는 것을 통렬하게 자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감지덕지하며 받아먹으며 살 수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매순간 배워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되는 것이며, 이미 구하여 얻으시고, 당신의 백성을 다 찾아내셨으며, 그들을 품에 안고 천국 문을 두드려 열어 버리신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 거룩한 하나님 나라로 입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뭐였습니까? ‘다 이루었다입니다.

조금 남아 있으니 너희들이 다 완료하고 올라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다 이루었으니 그것만 믿고 달려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전히 개처럼 돼지처럼 진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 거룩한 하늘의 보석인 복음을 무시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 그들에게는 절대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하셨던 하나님께서 당신의 무한하신 은혜의 보자기를 펴시어 우리를 덮으시고 여전한 개와 돼지를 하늘의 왕자와 공주로 바꾸어 주셨다는 이 감격적인 은혜의 현실에 행복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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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14-정말 평안하세요?(롬1:7)

    로마서(14) 정말 평안하세요? (롬1:7) 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얼마 전 뉴저지에 계신 어떤 인터넷 성도께서 전화를 주셨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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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11
    Feb 2014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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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유4 하나님의 불륜, 그리고 거기서 잉태된 불의한 성도(눅16:1~18)

    비유4 하나님의 불륜, 그리고 거기서 잉태된 불의한 성도 (눅16:1~18) 16: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청지기 하나를 두었다. 그는 이 청지기가 자기 재산을 낭비한다고 하는 소문을 듣고서, 16:2 그를 불러 놓고 말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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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28
    Jan 2014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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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13)사랑하심을 입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롬1:6-7)

    로마서(13)사랑하심을 입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 (롬1:6-7) 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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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28
    Jan 2014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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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비유3-기도를 가르치는 비유들(눅11:1~13)

    비유3 기도를 가르치는 비유들 (눅11:1-13) 11:1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기도를 마치셨을 때에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에게 말하였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것을 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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