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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3 기도를 가르치는 비유들

 

(11:1-13)

11:1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기도를 마치셨을 때에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에게 말하였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11: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여라.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고,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십시오.11:3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십시오

11:4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우리가 용서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11: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구에게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가 밤중에 그 친구에게 찾아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여보게, 내게 빵 세 개를 꾸어 주게.

11:6 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내게 왔는데, 그에게 내놓을 것이 없어서 그러네!' 할 때에,

11:7 그 사람이 안에서 대답하기를 '나를 괴롭히지 말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누웠네. 내가 지금 일어나서, 자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네' 하겠느냐?

11: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의 친구라는 이유로는, 그가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그가 졸라대는 것 때문에는,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11: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11:10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11:11 너희 가운데 아버지가 된 사람으로서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11:12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7)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다른 고대 사본은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하늘에서부터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오 늘 우리가 세 번째로 함께 공부할 비유는 흔히들 강청기도의 능력을 강조하고, 그러한 기도를 권장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비유를,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강청하여 졸라대면 하나님이 귀찮아서라도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야 마신다는, 그런 아전인수식의 해석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우리의 거룩한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꾸준히 반복하여 지속적으로 기도하면 그 정성에 감격하셔서 그 기도에 응답을 하시는 분일까요?

 

여 러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성경에 있는 말입니까?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말은 어때요? 그런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미국 개신교 교인들의 70%가 그러한 말들이 성경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충격적인 통계자료가 나왔었지요? 아닙니다. 그건 성경과 완전히 대치되는 개념들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늘은 하늘의 뜻대로 인간을 바꾸어냅니다. 하늘은 절대 인간들에게 다스려지거나 조종되지 않습니다. 하늘이 인간을 다스립니다.

하 나님은 절대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의 양이나, 기도의 자세나, 끈기 등을 고려하여 기도 응답의 가부를 결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성도의 기도를 당신의 뜻에 맞게 바꾸어 내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도 귀찮을 정도로 강청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보좌가 흔들려 하나님이 마침내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그런 류의 해석은 하나님을 한낱 해결사로 전락시켜 버리는 불경스러운 성경해석인 것입니다.

우 리네 인간 세상에서의 부모들도 자식들이 무조건 땡깡을 부린다고 그 요구를 다 들어주지 않습니다. 우리네 인간세상의 부모들도 그 자식의 요구가 과연 그 자식의 사람됨에 도움이 될 것인가 아닌가를 심사숙고 한 후에 그 자식의 요구에 대한 가부간의 응답을 합니다. 하물며 우리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숨과 바꾸셔서 당신 나라 백성으로 양육하고 계신 그 자식들의 요구를 그저 끈질김과 간절함이라는 것만을 근거로 하여 응답의 유무를 결정하시겠습니까?

기 도의 응답을 너무 못 받은 어떤 사람이 나중에 하늘나라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기도의 응답을 그렇게 못 받은 이유를 하나님께 여쭈어 보았더니 하나님께서 너는 참 끈기가 없더라, 금식 기도도 열흘을 작정해 놓고 여드레 만에 중단하고, 100일 새벽기도를 작정하고도 90일을 못 채우더라, 좀 더 끈기를 발휘해 보지 그랬어? 그럼 내가 들어주었을 텐데이렇게 대답을 하셨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그 하나님 무서워서 어디 천국에 함께 살 수 있겠습니까?

그 리고 오늘 본문 중 그 어디에 친구가 끈질기게 요구했다는 대목이 있습니까? 그냥 한번 물어본 것으로 친구의 요구는 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떡 세 덩이를 요청받은 그 친구가 잠자리에서 일어나 떡을 주었는지 안 주었는지도 밝히지 않으십니다. 그냥 질문을 하나 던지시고는 그 질문에 대한 제자들의 대답을 추론하셔서 기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계실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유가 강청기도의 능력에 대한 비유로 둔갑을 한 것은 인본주의적 색깔을 짙게 드리우고 있는 그 강청이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그 단어로 모든 비유의 내용이 흡수가 되어버린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비유가 담고 있는 진짜 내용은 무엇일까요? 지금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이 비유가 어떤 문맥 속에 들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하겠지요? 여러분이 보셨다시피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비유는 주기도문에 연결이 되어 있는 비유입니다. 그게 이 비유를 여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제 자들이 예수님께 기도에 대해 가르쳐 달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그건 단순히 기도의 방법이나 내용을 가르쳐 달라는 그런 요구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기도를 거의 습관처럼 자주 하고 있었고, 기도를 무척 중요한 종교행위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문 몇 개씩은 늘 암송하고 다녔고, 시편의 기도들을 노래로 만들어 흥얼거리며 다닐 정도로 기도에 열심이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에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유명한 기도문들이 여러 개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기도문들을 수시로 암송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카디쉬라는 좀 짧은 형태의 기도문도 있었고, 18번 축복기도라 불리는 세모네 에스레라는 기도문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카디쉬와 같은 기도문들을 의무적으로 매일 두 세 번씩 낭송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기도를 많이 알고 있었고 많이 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렇다면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구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인가? 당시 커다란 무리를 이루고 있던 종교적, 정치적 이익 집단들은 각각 자신들의 믿는 바와 지향하는 바를 특화시켜서 기도문으로 요약하여, 마치 신앙고백서나 사명선언문처럼 암송하거나 읽고는 했습니다.

바 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 세례요한파, 헤롯당 등등 모든 집단들이 각각의 특색을 살린 기도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좇는 제자들은 그러한 배경 하에서 주여, 우리에게도,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준 것처럼, 기도문을 하나 만들어 주세요.’라고 요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파만의 특화된 기도문을 하나 갖자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요구를 금방 간파하시고, 그 자리에서 예수를 좇는 자들이 드려야 하는 기도의 핵심을 몇 가지로 나누어서 하나의 기도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게 우리가 알고 있고 늘 암송하고 있는 주기도문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공부하셨다시피 이 주기도문은 우리 자신의 소원을 이루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것 정도를 그 내용으로 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우리성도의 정체성을 규정하며, 우리 성도가 도달하게 될 궁극의 목적지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 의 품속에 가지고 있는 나의 가장 깊은 소원이 내가 누구인가를 정의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추구하고 있으며 무엇을 가장 소원하고 있는가?’로 그 사람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가슴 속 깊은 곳의 소원이 나를 정의하고 나의 기도가 그 소원을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면 내가 지금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가가 바로 내가 누구인가를 정의 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우리의 가슴 깊은 곳의 소원이 우리의 기도로 나타나고 그 기도가 우리가 누구인가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이야말로 주님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하셨다는 것은 우리 성도는 바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기도의 내용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소원으로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며, 그러한 소원을 가지고 사는 이들로서의 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정의해 보라고 우리에게 기도문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문을 하나 만들어 우리의 색깔을 규정하고 찾아주세요라는 제자들의 요구에 너희들은 이렇게 살게 될 것이고, 이러한 완성지점으로 갈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대답을 해 주신 것이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을 제가 사역(私繹)으로 조금 구체적으로 늘여서 번역을 하면 이러합니다. 우 리 성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들이며, 우리 때문에 모독을 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은 반드시 거룩하게 찬양을 받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될 것이고,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온전히 성취가 될 것이며, 우리에게 하늘의 만나이신 예수님을 양식으로 주셔서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우리를 살려내신 하나님께서, 다른 세상의 양식들을 모두 쳐 내시고, 오직 예수라는 양식으로만 배부른 자들로 만들어 내실 것이고, 율법에 의해 형벌을 가해야 하는 율법의 시대가 가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은혜의 시대가 와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율법으로 정죄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으며, 가시적으로도 완성이 될 것이고, 선악과라는 시험, probation 기간이 완전히 끝나고 생명나무만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이 곧 도래할 것이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모두 아버지께만 돌려지는 그러한 완벽한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며, 그 나라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 자들이 바로 우리 성도인데, 그 모든 것이 하늘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영적으로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이게 주기도문이 담고 있는 우리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 런데 주기도문 안에 쓰인 동사가 전부 부정과거 시제입니다. 이 부정과거 시제는 과거에 이미 일어나버린 일회적 사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정과거가 imperative, 명령형으로 쓰이면 과거의 의미와 현재의 의미와 종말론적 의미를 함께 포함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우리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할 때, 그 안에는, 그 나라는 이미 임했으며, 임하고 있으며, 반드시 임할 것이란 뜻이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의 모든 동사가 부정과거 명령형입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은 과거에 이미 임한 것과 현재에 진행 중인 것과 종말의 현실이 모두 그려져 있는 이미아직의 교리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기독교 핵심교리의 보고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의 청원을 구체적으로 나누어보면 크게 일곱 개로 나누어집니다.

 

1)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A)

2) 나라이 임하옵시며(B)

3)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C)

4)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D)

5)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C')

6)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B')

7)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A')

 

저 는 이 주기도문의 구조를 카이즘 구조로 봅니다. 1항과 7항을 AA'로 보고 2항과 6항을 BB'로 봅니다. 그리고 3항과 5항을 CC'로 봅니다. 그리고 4항을 이 기도문의 핵심인 D로 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세상의 악이 완전히 제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AA'가 연결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완성이 되기 위해서는 선악과의 시험기간, 하나님의 probation기간이 끝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BB'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땅에서도 현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십자가에 의한 죄 사함, 즉 은혜의 나라의 완성에 관한 것이므로 CC'를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 렇게 카이즘 구조로 밀고 들어 가다보면 가운데 하나가 남지요? 그게 카이즘 구조의 핵입니다. 그게 뭡니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입니다. 그러니까 카이즘 구조의 나머지 내용들은 바로 이 양식이라는 핵으로 모두 수렴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주기도문의 모든 기도가 겨우 우리가 이 땅에서 먹고 살 양식에 관한 기도였단 말인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성경 자체에 모순이 일어납니다. 이 주기도문이 기록이 되어 있는 마태복음으로 가면 오늘 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어구 바로 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6:25)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 하냐

 

바 로 위에서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고, 금방 밑에서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떤 걸 좇아야지요?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지금 주님이 주기도문에서 제자들을 비롯한 성도들에게 구하라고 하는 일용할 양식은 단순히 이 땅에서 먹고 살 양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 러분의 성경을 잘 보시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일용할 양식이라는 단어 옆에 풋 노트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혹 내일의 양식이라는 말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일용할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에피우지온이라는 단어에 여러 가지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에피우지온이라는 단어는 헬라의 어떤 문헌에도 쓰인바가 없는 아주 생소한 단어입니다. 성경에서도 딱 여기서 한번 쓰였습니다. 따라서 그 헬라어 에피우지온이라는 단어가 현재에 어떠한 의미로 쓰이고 있는가를 가지고 고대 당시의 문헌을 해석을 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언어의 의미는 수시로 변하니까요? 제가 토플 시험을 볼 때만 해도 ‘gay’라는 단어는 ‘joy’라는 의미로 쓰였던 단어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동성연애자를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지요?

 

그렇다면 다른 그 어떤 문헌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그 에피우지온이라는 단어의 뜻을 어떻게 올바로 해석을 할 수 있습니까? 그때 필요한 것이 아람어 성경입니다.

예 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아람어를 쓰셨습니다. 아람어는 바벨론의 언어인데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70년간 있으면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아람어가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히브리어는 유대인들 중 아주 극소수의 학자들이나 랍비들 정도나 쓸 수 있는,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잊혀 진 언어였습니다. 그래서 아람어 성경은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잘 그려주는 그러한 좋은 참고가 됩니다. 그래서 헬라어 성경의 단어해석이 모호할 경우, 항상 아람어 성경과 비교 대조하여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아람어 주기도문에는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그 부분을 번역을 하면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오늘 먹을 양식을 주세요.’가 아닌,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세요.’라는 청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자체 모순을 일으키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 렇다면 내일의 양식, 내일의 떡이 무엇인가? 구약에 바로 그 내일의 양식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일의 양식을 오늘 주신 적이 있었지요?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6일 째 되는 날에 항상 내일의 양식을 함께 주셨습니다. 왜 여섯째 날에 다음날 것까지 주셨습니까? 그 다음날이 안식일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는 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기 때문에, 여섯째 날에 일곱째 날 것까지 거두고, 안식일에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온전한 창조를 기념하며 즐기고, 종말에 이루어질 참 안식을 고대하라는 의미에서, 여섯 째날 다음날 것까지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여섯째 날 내일의 양식까지 주심으로 안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하시고, 아울러 그 안식의 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은 반드시 약속의 땅에 들어가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걸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안식의 날인 내일이 오지 않을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굳이 내일의 양식까지 오늘 주실 필요가 없잖아요? 이스라엘은 여섯째 날에 벌써 일곱째 날의 양식인, 내일의 양식을 소유하고 있음으로 해서 여섯째 날에 일곱째 날을 미리 누리면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여섯째 날을 살면서 완성의 날인 일곱째 날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내일의 양식을 가지고.

 

예 수님이 쓰셨던 아람어 주기도문을 보면 거기 마헬이라는 아람어 단어가 나오는데 그 단어가 내일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람어의 마헬이라는 단어는 그냥 24시간 후의 내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오늘과는 다른 날, 즉 다가올 시대의 내일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다가올 시대의 삶을 무어라 한다고 했지요? 영생이라 한다 했습니다.

따 라서 우리가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 다가오는 날의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는 지금 바로 다가올 영원한 안식의 나라, 천국을 기다리는, 종말을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며, 이 땅에서 그 천국을 맛보면서 사는 자들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 안식의 나라,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 리는 다가올 내일, 즉 하늘나라를 살게 될 하늘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저 하늘의 것으로 먹고 마시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 나라를 통치하시는 왕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 나라를 준비하며 사는 자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하늘의 양식이 무엇입니까?

다가올 시대, 즉 영생을 위한 양식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늘의 떡, 하늘의 양식이신 예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6:27,48~51)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다가올 시대에 필요한)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

48 내가 곧 생명의 떡 이로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 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 이로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떡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와 일용할 양식에서 양식으로 번역이 된 단어가 똑같이 헬라어 알토스입니다. 떡과 양식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통하여 일용할 양식, 일용할 떡을 구하라고 하신 것은 바로 내일의 양식, 다가올 세대의 양식, 영생하는 양식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라는 뜻으로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예수에 의해 죄가 사해지고, 그 예수에 의해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며, 그 예수에 의해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고, 그 예수에 의해 하나님의 공의가 채워져 율법의 시대가 가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율법의 형벌로 정죄하거나 심판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는 은혜의 시대가 온 것이며, 그 예수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회복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의 카이즘 구조 가장 가운데에 내일의 양식, 내일의 떡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의 핵심은 내일의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바로 그 양식, 떡에 관한 구체적 설명이 바로 떡을 구하는 친구의 비유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비유가 주기도문과 붙어 있는 것입니다. 역시 그 비유에 등장하는 떡도 알토스입니다.

 

당 시 유대인들은 더운 날씨를 피해 밤에 주로 여행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여행길에 식당이나 여관이 많지 않았던 시대이기 때문에, 거의 늦은 밤에 목적지에 도달하여 숙식을 해결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렇게 밤을 타고 찾아온 친구가 떡을 좀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는 떡이 없었습니다.

 

K. E. Bailey라는 신학자는 복음서를 복음서의 배경인 중동에서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 중동에 가서 30년 이상을 계속 살면서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했던 사람입니다. 저도 신학교 때 그의 책을 보면서 당시 유대 지방의 관습에 대해 참 많이 배웠는데요, Bailey 박사에 의하면 당시 중동지방의 사회는 철저한 공동체 사회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떡도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만들었고, 어느 한 집의 손님은 그 집만의 손님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손님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한 사회문화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에 나오는 대표의 원리나 연합의 원리가 그리 생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친구 개념은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친구의 개념과 많이 달랐다고 합니다. 그들은 부모나 자식 등의 관계가 아주 친밀하게 무르익었을 때의 그 관계를 친구 관계로 설명을 했을 만큼, 당시 중동지방의 친구관계라는 것은 네 것 내 것이 없는 아주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따 라서 밤에 친구 집에 도착한 그 친구도 미안해 할 것이 전혀 없는 상태였고, 그 친구를 맞아 다른 친구 집으로 떡을 빌리러 갔던 친구도 전혀 미안할 것 없이 떡을 요구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풍습 하에서 그 손님은 마을 전체의 손님이었고, 그날 떡을 만든 집이 바로 잠자고 있던 친구의 집이었으며, 친구 사이는 밤낮 구별 없이 아무 때나 그 집의 것을 제 것처럼 쓸 수 있는 사이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상황을 설정해 놓으시고 질문을 하나 던지십니다.

 

(11:6-7)

6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이 질문은 제자들에게 실소를 자아케 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아니오라는 대답은 상상할 수도 없는 대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연한 질문을 예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유는 끝이 납니다. 이렇게 이 비유에 떡을 구하는 친구의 강청이나 끈질김이나 땡깡은 단 한 줄도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그 질문으로 비유의 내러티브는 끝이 나고 설명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본문 8절로 갑니다.

 

(11:8)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여기에 딱 한번 나오는 강청이라는 단어 때문에 이 비유가 크게 오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쓰인 강청이라는 단어는 아나데이아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는 사실 교부시대를 거쳐 중세 시대에 들어와서야 강청함, 끈질김 등의 단어로 쓰였지 그 전에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던 단어였습니다.

유 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책 ‘Jewish War’나 유대 랍비들의 문헌, 그리고 70인역 등을 보면 당시에 아나데이아라는 단어는 모두 수치를 피하기 위함,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함,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함등의 의미로 쓰였던 단어입니다. 그러다가 라틴어 성경 번역본에서 처음으로 ‘importunity’(강청함)이라는 뜻으로 번역이 되었고, 곱틱 번역본에서 ‘persistence’(끈질김) 등으로 번역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단어들과 상황들을 우리의 문화권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서 그 비유를 우리의 문화나 언어로 옷을 입혀 현대화 시켜 버리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 설명을 해 드린 단어의 배경이나 사회문화적 배경 등을 정보로 하여 이 비유를 다시 해석해 보자고요.

한 친구가 밤을 타고 다른 친구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 친구는 당시 집단적이며 공동체적인 사회문화 속에서 당연히 그 마을 전체의 손님입니다. 그래서 방문을 받은 친구는 스스럼없이 그날 마을의 떡을 구웠던 친구의 집으로 떡을 가지러 갔습니다. 만일 그날 떡을 구운 친구가 귀찮아서 떡을 내어 놓지 않는다면 그 친구는 물론이요, 마을 전체가 수치와 창피를 당하게 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수치와 마을의 수치는 친구 사이라는 관계를 넘어서는, 모든 행위의 근거와 이유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그렇게 소중하고 당연한 친구사이라 해도 귀찮아서 떡을 안 내어놓을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수치를 당치않기 위해서는(강청, 아나데이아)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건 너희들도 아는 것 아니냐?’

그 러니까 세 친구와 떡 세 덩이의 비유는 절대로 거부당할 수없는, 어떤 당연한 요청에 대한 하나의 그림으로 제시가 된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고, 조르면 주게 되어있다라는 그런 유치한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비유에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어떤 요구가 붙어 있는지 보세요.

 

(11:9-12)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세 친구의 비유 아래에 그 유명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권고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찾고, 두드려서 무엇을 얻어내라는 말입니까? 떡이요. , 알토스는 누구다? 예수 그리스도. 그런데 주기도문에 의하면 그 떡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어요? 아니에요? 부정과거 시제로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 했잖아요?

그렇다면 우리 성도가 하늘의 양식인 예수를 열심히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얻어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예수라는 하늘의 만나를 먹은 자로서 하늘백성다운 삶, 예수 같은 삶,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삶을 추구하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 일을 해 주러 오신 분이 누구입니까? 성령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결론이 13절로 나게 되는 것입니다.

 

(11:13)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그 러니까 주기도문으로 시작하여 세 친구의 비유로 끝이 나는 누가복음 11장의 전체 내용이 뭡니까? 하늘의 떡을 먹은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 즉 떡을 먹은 자로서의, 떡을 닮은 삶을 당연히 추구하게 되어 있는 것이며, 아버지는 반드시 그 추구를 완성시키시고 성취시키실 것이며, 그 일의 보증으로 성령이 와 계신다고 하는 구속사 전체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에게 먹여진 그 떡의 삶이 우리의 삶 속에서 잘 나타나지 않을 때, 그리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처우답지 않은 고난과 환난의 삶이 닥칠 때 우리가 많이 낙망하잖아요?

거기에 대한 답으로 주신 비유가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인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행의 내러티브 가운데 비유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행의 내러티브 중 기도에 대한 비유가 세 가지가 나오는데 그 셋은 전부 연결이 되어 있는 비유입니다.

 

(18:1~8)

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이 불의한 재판관과 강청하는 과부의 비유 또한 하나님을 귀찮게 조르면 반드시 주신다는 식의 유치한 내용이 아닙니다. 그 내용을 잘 보시면 불의한 재판관과 선한 하나님, 그리고 과부와 택한 자로 대조가 되어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아주 불성실한 재판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성실한 자가 과부의 강청이 귀찮아서 그의 소원을 들어 줍니다. 그것과 대조해서 선하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은 택한 자들이 밤낮 부르짖고 있는 그 내용을 이미 아시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밤낮 부르짖지 않아도 반드시 그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대조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의 기도는 모두가 하나님은 에 대한 기도인데 그 떡은 이미 주어졌을 뿐 아니라 가시적으로도 완전하게 우리를 점령해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 런데 가끔 그러한 확정된 현실이 의심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아니, 가끔이 아니라 너무나 자주 그렇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불의한 재판관처럼 느껴질 때가 있단 말입니다. 우리의 요구와 청원을 귀찮아 하셔서 마냥 침묵하고 계신 분처럼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거기에 믿음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고, 그 믿음을 선언하고, 더욱더 공고하게 다지는 것이 바로 기도라는 것을 이 비유가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가 어떤 문맥의 흐름을 타고 있는지 보세요. 바로 그 비유 앞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7:20,22,25,33)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 하리라

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 지니라

3

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게 되는지를 묻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주기도문의 기둥메시지이지요? 이 내러티브가 오늘 본문 누가복음11장에서부터 계속하여 흐르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세요.

주님은 지금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은닉성과 불 가시성,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실체에 대해 대답을 해 주십니다. 그 리고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될 때까지 그들이 감수해야 할 것들을 일러주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될 때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많은 고난을 받고, 이 세대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며, 심지어 목숨을 잃는 것과 같은 고난을 통과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것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은으로 시작이 되는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항상 기도하며, 인내로 기다려야 하는 것이라는 걸 쉬운 그림으로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은닉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성도 또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십자가 삶을 실재 화하여 살아야 하기 때문에, 성도는 항상 기도로 확인하고, 기도로 힘을 얻고, 기도로 믿음의 고백을 하며 살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은 닉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 때문에 때론 낙심이 되어 기도하고, 여전히 같은 모습인 것 같은 자신의 모습 때문에 기도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속히 이루실 하나님의 연약과 전능하심을 믿기에, 그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예수라는 떡을 구하는 기도지요? 하나님의 나라는 아들의 나라이니까요. 따라서 기도란, 이 세상에서 필요한 우리의 필요를 채우거나, 우리의 세상 적 소원을 성취하거나, 꿈과 야망을 이루는 데에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떡인 예수를 구하는 것으로 수렴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성취하신 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은닉되어 있는 관계로, 그 나라가 너무 요원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나의 육신적 연약함으로 낙망이 될 때도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낙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는데 하나님 아버지가 어떻게 자식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또 하나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도의 원한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가 이 세상에서 가져야 하는 원한이 뭡니까? 지금까지 들으신 내용들 속에서 한 번 답을 찾아보세요. 성도가 이 땅에서 가질 수 있는 원한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성 경은 분명 네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웃이 해를 입히거든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나 스데반도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자들을 향해 거룩한 용서의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우리 성도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원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늘나라에서도 원한을 품고 있는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진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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