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설교원고

로마서 19강~21강

by seoulsmyrna posted Mar 3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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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9)

로마에 가고 싶다

 

(1:11-15)

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이번 한국 집회 기간 동안 무려 세 교회에서 집회를 가졌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리고 짬짬이 서울 강북 모임, 강남 모임, 전북 모임, 경남 모임 등의 여러 서머나 인터넷 가족 모임에 참석을 해서 질문도 받고 토론도 하고 했습니다. 그분들의 진지한 눈망울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멀리 일본에서 뉴질랜드에서 일부러 휴가를 내서 집회에 참석을 해 주신 여러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역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제 마음 속에서 튀어나와 마치 화두처럼 떠나지 않던 단어가 희망묵시였습니다.

기실 서머나 교회를 시작하면서 우리 개척 멤버들의 마음속을 가득 메웠던 것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었습니다. 특히 담임 목사인 저는 서머나 교회가 이렇게 오래 지속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기복주의와 성공주의, 신비주의와 실용주의, 인본주의와 이기주의로 떡칠이 되어버린 왜곡된 기독교의 현실 속에서 과연 누가 이러한 자기부인과 십자가와 고난의 설교를 이해할 수 있으며, 과연 누가 그 말씀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 하는 그러한 종류의 절망이었습니다. 그건 작금의 기독교는 총체적인 왜곡과 타락의 총화인 절망덩어리라는 처절한 현실인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현실인식 속에서 그들의 왜곡과 변질에 분노하면서도 여전히 그러한 모습을 오염(macula)의 형태로 갖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더 절망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때 든 생각, ‘이래서 인간들에게는 예수가 필요하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서머나 교회에게 맡긴 사명이 신비주의와 기복주의에 물든 가짜 기독교에 엿이나 먹이고 조용히 그들에 의해 맞아 죽는 것이라 생각해왔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여기까지 한 길만을 고집하며 달려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결국을 이 세상 속에서 십자가 지고 죽는 것으로 이미 상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서울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너무 오래 살아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현실 속에서 당신의 일을 열심히 성취해 나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이 역사 속에서 십자가지고 죽겠다고, 매일 매일 인간들의 추악한 죄를 들추어내고, 인간들의 가능성을 묵사발 내며, 인간들의 기특한 행위들까지도 자기의가 아닌지 의심해 보라는 철저한 인간 자존심 박멸과 하나님 은혜 앞에서의 처절한 인간 존재의 무력함을 낱낱이 폭로 하고 폭로 당하는 가운데, 묵시 속에서 이 땅으로 보내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하나 깨어나 그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돌아오는 놀라운 경험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죽음의 길을 가겠다고 교회 이름까지도 고난의 대명사인 서머나 교회라 명명하고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는데 주님은 그 죽음의 연기와 불길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 올리시고 계셨습니다. 그게 바로 왕의 개선 행진에 동원된 제물의 향기라 했지요?

심지어 번영의 신학을 개혁주의의 가면 밑으로 은밀하게 감추고 사람들을 선동하던 고지론의 본산지에까지 가서 십자가와 은혜와 인간들의 처음자리를 전하게 하시는 유머러스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그저 탄복을 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도구요 지팡이일 뿐인 것이고 모든 일의 성취는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건 이미 묵시 속에서 완성된 것이기에 실패될 수도 중도에 포기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한국 집회 기간 내내 제 마음 속에 희망묵시가 화두처럼 새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다는데 네가 뭔데 네 마음대로 절망을 하느냐는 일갈이 제 귀에 들리는 듯 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도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과 권능, 그리고 인간의 한계와 무력함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가서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11절의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한다라는 표현이나 13절의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라는 절절한 곡언법(부정적 표현으로 강렬한 긍정을 강조하는 표현법)의 표현 등이 그것을 잘 반증해 주고 있습니다. 11절의 원한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에피포데오를 번역한 것인데 그것은 간절히 기도하다, 대단히 갈망하다라는 뜻입니다. 사도는 그렇게 로마 교회에 가서 자기가 갖고 있는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고 싶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도의 기도를 안 들어주셨습니다. 그냥 편지만 보내게 하셨습니다. 나중에 로마로 보내시긴 보내시는데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무도 당당히 로마로 진군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죄수가 되어서 쇠사슬에 매여 로마로 끌려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완벽하게 모두 성취가 되었습니다. 사도는 로마로 가서 멋들어지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죽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계획하고 추진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로마 전체가 기독교에게 넘어와 버렸습니다. 그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인간의 한계를 극명하게 대조하여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기도 응답에 관한 우리의 편견을 깨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의 서신 서들을 보면 사도 바울은 참 기도 응답과는 거리가 먼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병 좀 고쳐달라고 그렇게 애타게 기도를 했는데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거절을 당했는가 하면 오늘 본문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바울이 열심히 기도하면서 가려고 했던 길을 수시로 막으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6:6-7)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15:22~24)

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보세요. 심지어 아시아에서의 전도 사역이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만큼 진행이 되었는데도 하나님께서 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살전2:18)

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보신 것처럼 하나님은 바울의 기도에 잘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당신의 일을 성취해 가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인간의 기도에 의해 바꾸시거나 변개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보좌를 흔드는 기도? 그런 거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기도를 하게 하시는가? 성도의 기도는 자신의 이루고자 하는 일을 이루거나 되고자 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을 일차적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앞에 항복을 하는 것에 첫 번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게 역사와 인생의 목적이기도 하고요. 성도는 그렇게 만사가 내 기도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 분의 신실하심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선이며 그것이 곧 참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자기부인의 과정을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도의 기도는 너무 응답이 잘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육적 자아를 소유하고 있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계획과 뜻과 소원이 뭐 그리 선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 응답이 척척 되는 것은 뭔가 수상한 것입니다. 사도들도 기도 응답을 제대로 못 받았다는 것을 절대로 명심하셔야 합니다.

 

이제 사도가 그토록 열심히 로마에 가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볼까요? 본문 11절을 보시면 사도는 로마 교회에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 그들을 견고케 하려했다고 합니다. 그게 사도가 로마에 가려고 했던 첫 번째 이유입니다. 도대체 그 신령한 은사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것으로 로마교회가 견고케 될 수 있다는 것일까요? 본문 15절을 보면 그 신령한 은사가 무엇인지가 정확하게 나옵니다.

(1:15)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이 그토록 간절하게 로마교회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신령한 은사가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로마 교회에 복음이 없었다는 말인가요? 아니지요? 분명 사도는 8절에서 이미 로마 교회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로마 교회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11절을 보시면 그 첫 번째 이유가 나오는데 그것이 견고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 단어는 공고히 세우다, 굳건하게 다지다, 강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사도는 이제 막 생긴 로마 교회를 공고히 세우고 굳건하게 다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왜 그런 작업이 필요했는가?

 

로마 교회는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아닙니다. 로마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 때 회심을 한 로마 거주 인들이 로마로 돌아가 세운 교회입니다. 혹자들은 그도 저도 아닌 무역업자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지고 그 곳에 교회가 생겼다고도 합니다. 로만 가톨릭은 그들이 초대 교황으로 떠 받들고 있는 베드로를 추켜세우기 위해 로마 교회의 설립자가 베드로라고 은근히 주장을 하지만 성경의 정황상 베드로는 로마 교회의 태동기에 로마에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로마 교회는 사도들이 아닌 일반 신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생겨난 교회가 맞습니다. 그런데 만일 로마 교회를 세운 사람들이 유대인들이었다면 갈라디아교회처럼 율법주의나 유대주의가 많이 섞였을 것이고 이방인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다면 교리적인 부분이 아주 미약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교리적으로 연약하고 불순물이 섞여 있을 지도 모르는 로마 교회에 말씀을 더욱 깊이 가르쳐서 그들의 믿음을 견고케 해 주고 싶어서 로마 교회로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로마서 15장으로 가면 사도 바울의 그러한 마음이 더 잘 나타나 있습니다.

(15:19~20)

19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보시다시피 사도는 복음이 올바로, 견고하게 전해진 곳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복음을 들고 가서 설교를 해야 할 곳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미 복음이 전파되어 있었던 로마 교회에 그토록 가보기를 원했다는 것은 로마 교회의 교리적 배경이 견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반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쓰여 진 것이 바로 이 로마서입니다. 조금 윗 구절로 가볼까요?

(15:14~15)

1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15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15절의 대강이라는 단어는 대충이라는 말이 아니라 메노스, 어떤 부분에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도가 어떤 부분에서는 매우 충격적일 정도로 담대하게 복음을 기록하여 로마 교회에 보낸 것은 그들이 이미 받은 복음을 더욱 명료하게 전해주어 그들이 가진 것을 상기시키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믿음이 견고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쓴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 말씀의 지속적인 학습과 공급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에게는 분명 성숙의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연약함과 견고함, 분명 다른 거잖아요?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제 말은 성도의 육적 자아가 변화된다는 말이 아니라 성도의 육적 자아가 부인됨으로 해서 그 질그릇 같은 성도의 육적 자아 안에 들어와 계신 보배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더욱 선명히 드러나게 되는, 그러한 종류의 성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성숙의 주체는 성도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분명 가시적이며 실존적인 변화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묵시 속의 구원은 이미 창세전에 완료가 되어 있는 상태이지만 이 역사 속에서의 구원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가지 시제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고전3:1~2)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 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보세요.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젖먹이 어린아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 말은 밥을 먹는 어른도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도 동일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4:14~15)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 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여기에서 어린 아이라고 번역이 된 네피오스는 당시 미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던 단어였습니다. 성도는 어떤 지점을 향해 방향성과 지향성을 가진 역동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육적 자아의 측면에서 성도를 관찰할 때, 성도라는 인간은 죽는 날까지 죄만 쏟아놓고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사시는 성령의 열심의 관점으로 성도를 관찰하면 분명 하나님의 일하심이 그의 삶 속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변화는 성화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인간의 열심에 의해 격발이 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무장해제가 되어 지고 육적 자아가 부인이 되어 지는 가운데 하나님의 주도하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2:13)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 구절을 잘 보시면 성도 안에서 일어나는 행함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행함이 밖으로 드러날 때에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 살고자 하는 성도의 염원으로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뭐 대단하게 착한 행위들이 나온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은 성도가 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라는 것은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행위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려 하는 모든 사유와 행위를 다 죄라 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자신이 주체의 자리에서 내려와 피조물의 자리에 제대로 안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이끄심에 자신을 맡기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 합니다. 따라서 성도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 소원을 두고 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주체성과 자아실현의 야망을 버리는 쪽으로 밀려가게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게 선입니다. 그게 죄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염원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걸 다른 말로 믿음의 삶이라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삶의 주체가 에게서 대상에게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타자의 도움이 절실한 자신의 실존을 올바로 자각하게 된 상태에서 다른 타자에게 라는 존재를 맡기는 행위를 믿음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의 전제는 철저한 자기부인인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위, 진짜 성화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의 외우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가지요.

(6:27~29)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성도가 반드시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뭡니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만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 앞에 모든 인간의 행위는 부정되고 부인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라는 존재와 그 존재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위에 대한 불신과 부정이 전제된 것이니까요.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시는 순간 그들의 모든 행위들을 차압해 버리십니다. 인간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신뢰를 하나하나 부수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그 전에는 자신의 선한 행위가 자신의 위상을 높여주고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챙겨주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복음이 지속적으로 떨어지니까 자신의 선한 행위 속에 들어 있는 숨은 의도, 즉 자기챙기기가 너무나 분명하게 보이게 됩니다. 그때 성도는 자신에 대한 신뢰를 조금씩 잃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밖의 타자, 그 중에서도 자신이 전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하나님께 자신을 조금씩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자기부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부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더욱 견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성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숙의 결과로는,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의 변화와 가치관의 변화 등이 나타납니다. 물론 거기에서 격발이 되는 행동양식의 변화도 나타납니다. 그게 신령한 복음에 의해 견고케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를 떠나며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복음만이 성도를 견고케 하는 유일한 도구임이 명확하게 나옵니다.

(20:29~32)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에게 부탁을 합니다. 그 말씀만이 너희를 든든히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직접 보낸 편지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옵니다.

(3:17~19)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즉 복음을 알게 되면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의 어떠함을 깨달아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견고케 됨입니다.

 

저는 가끔 우리 청년들의 블로그나 홈피에서 그들의 글을 읽는데 그들의 글 속에서 성숙과 변화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7년 전 교회가 시작될 무렵 그들이 쓴 글과 요즘 그들의 글을 비교해보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글 속에는 반드시 그 당시 필자의 세계관과 가치관과 인생관이 담기게 됩니다. 7년 전의 우리 청년들의 글 속에는 세상에 대한 치기어린 낙관과 야망과 꿈과 비전이 듬뿍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의 글들을 읽어보면 올바른 자아인식, 그러니까 올바른 자신의 처음자리 인식과 인간의 무력함과 무능함, 그렇게 집착하던 세상 것들에 대한 포기와 절연, 교묘하게 은폐시켜 두었던 자아의 폭로 등이 아주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어떻게 하면 자신을 근사하게 포장을 할까에 글의 초점이 있었다면 지금은 거기에서 자유롭게 해방이 되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성숙이며 변화입니다.

자신이 스스로를 볼 때에는 뭐 별로 변한 것도 없고, 여전히 이기적이고, 여전히 집착과 중독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 그들의 세계관과 가치관과 인생관이 변해있더라는 것입니다. 점점 더 예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자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분명 그러한 성도 안에서의 변화와 성숙이 하나님의 주도하에 이루어집니다. 어떻게 성령을 받은 자가 그렇지 못한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세계관과 가치관과 인생관을 갖고 살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 때는 몰라도 지속적인 말씀의 수유에 의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행위의 변화가 크게 일어나지는 않을 지라도 세계관과 가치관과 인생관의 변화가 방향성을 가지고 지향성을 가지고 일어나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게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 말씀의 파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골수와 관절을 쪼개어 인간의 실체를 낱낱이 해부하여 폭로해 버리십니다.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만이 오롯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고 철저하게 부인된 자아 안에서 예수의 은혜만을 의지 하고 서는 것이 바로 견고케 됨인 것입니다. 사도가 지금 그 일을 위해 복음을 들고 로마 교회로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그렇게 간절한 염원을 어떻게 하나님께 구하고 있는지 보세요.

(1:10)

10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이렇게 사도는 자신의 뜻과 염원을 항상 하나님의 뜻 안에서 점검하고 검증해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것이 혹시 자신의 생각과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닌지 늘 두렵고 떨림으로 확인하고 또 확인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좋은 길이라고 번역이 된 어구를 직역을 하면 길이 분명히 밝혀지다라는 뜻입니다. 사도는 자신의 염원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옳은 것인지를 점검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분명 확실한 길이 열릴 것이라는 걸 믿었습니다. 그리고는 분명한 길이 열릴 그때까지 기다렸던 것입니다. 어떠세요? 사도의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게 바로 말씀에 의해 견고케 된 자의 하나님 절대의존의 모습인 것입니다. 분명 자기부인에 의한 변화와 성숙이 나타나지요?

 

여기에서 또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사안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본문과 그 밖의 다른 여러 곳에서 보셨다시피, 사도가 판단하기에 로마 교회는 반드시 양육되고 견고케 되어야 하는 그리스도 안의 어린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견고케 하기 위해 로마로 가겠다는 사도의 간구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막으셨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로마 교회가 말씀으로 견고케 되는 과정을 겪지 않고 그냥저냥 흘러갔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반드시 구원의 현재 시제를 살아야 합니다. 로마 교회는 사도 바울의 서신에 의해 그리고 바울이 아닌 다른 종들에 의해 말씀의 수유를 받아 견고케 되는 과정을 통과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역사 속의 모든 일의 주체가 누구라는 말이 됩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어쩔 수없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홀로, 그리고 스스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관심은 당신의 백성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일을 성취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 하나하나의 믿음과 구원에 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당신의 종들의 충정까지도 묵살시켜 버리십니다. 심지어 마귀까지도 사용하셔서 인간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가르치십니다.

(살전2:17~18)

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그렇지요? 왜 하나님께서 사도의 그 충정을 그렇게 마귀까지 동원하셔서 막으셨을까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실행하시고 완료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하실 에 관심이 있으셨던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라는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과 구원에 일차적으로 관심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사도는 그렇게 번번이 자신의 계획과 뜻이 무산되는 경험을 함으로 해서 자신이 뭐 대단한 자격과 조건을 갖추어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팡이로 써 주시는 것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도의 경험이 이러한 고백을 하게 했습니다.

(고전15:9~10)

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로라

자신은 절대로 어떤 자격이나 조건을 갖추어서 사도가 된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서 나온 모든 행위와 업적은 다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라는 것을 그가 알았습니다. 그게 믿음이며 그게 자기부인인 것입니다. 로마서 15장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옵니다.

(15:17~18)

1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의 말과 일, 표적과 기사의 능력 등 모든 것이 다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합니다. 자기는 그저 하나님의 도구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자기의 뜻과 계획이 사단에 의해 막히는 것처럼 보일 지라도 조급해 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면 사단이 아니라 사단 할아버지가 방해를 해도 이루어질 것이고 하나님이 막으실 것이면 그 어떤 훌륭한 명분으로 위장을 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막으실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사도가 로마 교회에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이유는 본문 12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12)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사도는 피차 안위함을 위하여 로마 교회에 가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안위함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쉼파라칼레오라는 단어는 서로 위로하다(comfort together)’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 단어를 보면서 사도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도가 지금 로마 교회만을 위로하기 위해 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그들로부터 위로를 받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왜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 위로를 받아야 하나요? 사도는 예수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늘 외로웠습니다. 사도의 시대에도 그만큼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적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개척한 교회에서도 매번 오해와 질시와 모함에 의해 쫓겨나야 했고, 함께 하던 동역 자들로부터도 수시로 버림을 당했습니다.

(딤후1:15)

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딤후4:10~11, 16)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복음을 사는 이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고립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버림을 받습니다. 세상은 예수를 미워하여 죽여 버렸던 것처럼 그 예수가 남기고 간 예수의 형제들을 똑같이 미워합니다. 그건 예수님의 예언이었습니다. 그렇게 외롭고 고달픈 신앙의 여정 속에서 나와 한 길을 가고 있는 참 신앙인들을 만난다는 것보다 더 큰 위로는 없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는 말할 수없는 핍박 속에 던져져 있었다고 했지요? 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는 그토록 힘겹게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는 자신의 현실을 로마 교회와 나누며 그들만이 그 힘겨운 고난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열심히 견뎌내고 있는 로마 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역시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그것을 고린도 후서에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고후1:6-7)

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하나님의 철장에 의해 철저하게 자기부인 작업을 당하고 있는 성도의 고난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모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한 길을 가는 동지들을 만나면 눈물이 터지기도 합니다. 이번 한국 집회에서 만난 우리 서머나 인터넷 식구들이 휴가를 내서 집회 장소에 찾아와 아예 숙소를 잡고 전체 집회에 다 참석을 하신 후 마지막 날 제 손을 잡고 하나같이 눈물을 쏟으시는 것을 보면서 제가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분들도 마찬가지고요. 얼마나 외롭고 힘이 들었으면 뉴질랜드에서 일본에서 익산에서 양산에서 통영에서 휴가를 내어 찾아오셨겠습니까? 한길을 가는 성도들은 그렇게 서로 얼굴만 봐도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나만 남아서 이렇게 외로운 길을 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고, 거기에도 있었구나 하는 안도, 그것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도 그렇게 위로가 필요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물며 여러분은 어떻겠어요? 그래서 여러분은 모이기를 힘쓰셔야 하는 것입니다. TV가 여러분을 위로해 줄 수 있을 것 같으세요? 취미활동이 여러분을 위로해 줄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세상 친구들이 여러분을 위로해 줄 수 있을 것 같으세요? 문명이 여러분을 위로해 줄 수 있나요? 아니요. 천만에요. 여러분이 성령을 받은 성도라면 여러분은 그러한 것들에게 오히려 미움을 받고 실망을 하셔야 맞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절대로 성도를 견고케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를 죽이는 것입니다. 성도를 견고케 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복음뿐이며 성도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은 성도 간의 교제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들 스스로의 인식을 조작하면서까지 복음을 거부합니다. 스스로 속고 있단 말입니다. 예수만 의지하면 된다는데, 예수님의 공로만 의지하면 된다는데, 하나님께 항복만 하면 된다는데 그게 싫은 겁니다. 선악과 따먹고 신처럼 되어 버린 위대한 인간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것입니다.

펜실베니아 대학의 제임스 서펠 교수의 ‘In The Company of Animals’라는 책을 보면 인간의 자인식조작의수단이구체적으로설명이되는데그것이절연(detachment),은폐(concealment), 책임 전가(shifting the blame), 왜곡(misrepresentation)입니다.

최근에 한국에서 발생했던 구제역 생매장 사건을 예로 들어서 설명을 해 드리면 이러합니다.

지난 석 달간 한국의 소와 돼지들 수백만 마리가 단지 전염병에 감염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생매장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가재도 고통을 느낀다고 하는데 하물며 소와 돼지는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소식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젓가락에 돼지고기 삼겹살을 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 인식 왜곡과 조작의 수단을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드는 것임)

인간은 그러한 일들이 생기면 얼른 절연(detachment)을 해 버립니다. 나와 돼지는 다른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돼지는 더럽고 역겨운 동물이라고 왜곡(misrepresentation)이라고 합니다. 나찌가 일부러 수용소 안의 유대인들을 개돼지처럼 지저분하게 만든 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죽인 것처럼. 그러면서 구제역이 뭐 내가 퍼트린 건가?’라는 책임전가(shifting the blame)를 합니다. 그리고는 얼른 그 증거물들을 묻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끗하게 포장이 된, 돼지의 형태를 전혀 추측할 수조차 없는 깨끗하게 다듬어진 돼지고기 포장 상품으로

은폐(concealment)를 시도합니다.

이게 인간과 돼지와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왜곡이요 조작이면 괜찮은데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동일한 자 인식의 조작과 왜곡이 벌어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은 사회법이나 도덕과 윤리 등의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 인간들을 붙들고 있어서 대량 학살은 자주 일어나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우주와 역사를 붙들고 계신 일반 은총을 확 빼버리시는 날 인류는 서로를 대량 학살하여 땅에 생매장하는 일을 서슴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사람들 마음속에서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지금 이 시간에도 리비아에서는 수 천 명이 학살을 당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그러한 학살에도 가슴 아파하지 않지요? 왜 쌍둥이 빌딩 안에서 수 만 명이 불에 타 죽어도 우리의 감정은 이렇게 밋밋합니까? 지금 이 시간 아프리카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오늘 점심 메뉴가 뭘까를 생각합니다. 이것이 인간 자 인식의 왜곡과 조작의 실태입니다. 절연, 은폐, 왜곡, 책임전가.

인간의 공감의 그릇은 그토록 작습니다. 심지어 인간과 역사는 자신들의 그 잔인함을 근사한 행위들로 위장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인류의 역사상 가장 포괄적인 동물 보호법을 만들어 반려 동물 뿐 아니라 일반 가축까지도 끔찍이 사랑한 정부가 어떤 정부인지 아세요? 히틀러의 나찌 정부였습니다. 히틀러는 동물 보호법을 제정하여 동물을 학대하는 것을 금지한 것은 물론이고, 닭에게 강제로 모이를 주는 것, 가축을 잔인하게 도살하는 것도 금지했으며, 바다 가재를 죽일 때에도 정해진 시간 안에 빨리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고통 없이 죽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류를 죽일 때는 반드시 마취를 하고 죽여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꽁치 한 마리를 구워 먹기 위해서 산 꽁치를 마취시킨 후 죽여서 요리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나찌 정부가 얼마나 동물 보호에 신경을 썼는지 헤르만 괴링의 연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동물은 유기체적 의미에서 생명체일 뿐 아니라, 각자의 삶을 살고 지각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들이며, 고통과 즐거움을 느끼고 충성심을 지닌, 애정의 대상이다. 따라서 동물을 여전히 소유물로 취급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강제 수용소로 보내버리겠다"

훌륭해 보이죠? 박애주의자 나셨습니다. 그런데 괴링은 이 연설을 한 날도 수 천 명의 유대인들을 가스실에서 학살해 버렸습니다.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요. 이게 바로 왜곡되고 조작된 자 인식 속의 인간의 모습입니다. 자신들의 더러운 모습을 착한 행위로 위장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성도가 무엇으로 견고케 될 수 있겠습니까? 그 속에서 성도가 무엇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말씀입니다. 성도 간의 만남입니다. 성도 간의 교제입니다. 그것이 부족할 때 성도는 영적 영양실조에 걸리게 됩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서 자기가 가진 복음을 나누려 했던 것처럼, 성도 간의 교제로 위로를 하고 위로를 받으려 했던 것처럼, 여러분도 로마에 가고 싶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로마는 교회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오셔서 말씀을 진지하게 공부하시고, 성도 간의 풍성한 교제를 나누십시오. ‘로마에 가고 싶다

이 바울의 애절한 염원이 예배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간 여러분의 귀에 이명 현상처럼 울리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나누고 싶다, 천국 가족들을 보고 싶다, 견고케 되고 싶다, 하늘 위로를 받고 싶다, 이게 여러분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20)

신령한 것 안에서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

 

(1:9~11)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우리는 지난주에 사도가 로마교회에 전해 주고 싶어 했던 신령한 것의 용도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견고케 됨과 피차의 위로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토록 로마에 가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사도가 로마 교회에 전해 주고 싶어 했던 그 신령한 은사의 구체적인 내용을 공부하고, 사도가 9절에서 언급한 그의 아들의 복음(신령한 은사) 안에서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라는 어구가 가진 웅숭깊은 메시지에 관해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바에 의하면 사도는 복음을 신령한 은사, 직역을 하면 영적인 선물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거기에 쓰인 단어가 헬라어 프뉴마티코스입니다. 그 단어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프뉴마, 성령이라는 단어에서 파생이 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은사, 복음은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하늘의 선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9절에서, 그러한 신령한 은사를 이미 받은 자신에게서 나타나게 된 현상을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라는 어구로 표현합니다. 신령한 은사, 즉 성령으로부터 격발이 된 영적인 선물을 받고 나니 하나님을 심령으로섬기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쓰인 단어가 프뉴마입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것 안에서 심령으로 섬긴다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고, 성령에 의해 주도되는 섬김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 말고 다른 종류의 잘못된 섬김도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지요? 간단히 말하면 영에 의한 섬김이 있는 반면에 육에 의한 섬김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그렇게 육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긴 적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10장에 가면 그러한 잘못된 섬김의 예가 잘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10:2-3)

2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

자신을 포함한 이스라엘이 유대주의, 율법주의 안에서 하나님을 섬긴 것이 기실 자기 의를 세우려는 섬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건 엄밀히 말해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섬긴 것입니다. 섬김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체를 타자로 상정하고 있는 것인데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섬김은 주체가 자기 자신입니다. 그건 올바른 섬김이 아닙니다. 그걸 율법주의라고 하고 유대주의라고 하며 결국 그것은 인본주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인본주의적인 자기 의 세우기 차원의 섬김과 대척점에 있는 섬김인 것입니다. 쉽게 말해 심령으로 섬긴다는 것은 자기의 의가 박살이 나게 되고 자기가 부인이 되는 그런 섬김을 말합니다. 그게 아들의 복음(신령한 은사) 안에서의 하나님 섬김인 것입니다.

사도는 이제 막 생겨난 로마 교회가 혹 그러한 잘못된 하나님 섬김에 열심을 낼까봐 걱정스러워, 그들을 견고케 해 줄 요량으로 신령한 선물을 가지고 로마 교회로 한 달음에 달려가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열심을 부린다는 사람들이 전부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과 그것을 올바른 열심과 섬김으로 고쳐 낼 수 있는 길은 오직 신령한 은사, 즉 하나님의 올바른 복음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이들에게서 그러한 가짜 섬김과 왜곡된 열심이 나오게 되는지에 관해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게 되면서 평생을 하나님의 일에 헌신을 하다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된 사람들의 마지막 순간을 여러 차례 목격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의 마지막이 보편적인 통일성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 나라로의 입성을 즐거워하며 평안하게 세상을 떠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자신을 그렇게 죽게 하신 하나님께 골이 난 상태에서 불편한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슬픈 것은 후자 쪽이 훨씬 많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죽음이라는 생경한 현실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의 죽음의 현실을 작게나마 수시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 성도들의 삶이라면 그러한 성도들의 죽음이 그렇게 불편하고 원망스러운 것일 수만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죽하면 하나님께서도 성도들의 죽음을 귀하게 보신다고 하셨겠습니까?

 

죽음이 두렵다는 것은 이 세상 속에서 죽음의 현실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해 보지 못한 자의 생경함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을 사망이라고 하는 진짜 죽음에서 건져내셨다고 하는 하나님에 대한 생경함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계신 곳에 가는 것이 불편한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라 했는데 그분에 대해 잘 모르니까, 그분의 속성이나, 그분의 영광이나, 그분의 사랑이나 은혜나 긍휼에 대해 잘 모르니까 하늘의 삶인 영생이 불편한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에 대해 여전히 무지하다는 증거이며 그러한 두려움에는 반드시 형벌이 있다고 사도 요한은 명확하게 전언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고 성령에 의해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의 마지막이 어떻게 그러한 불편함으로 종영이 되겠습니까? 그러한 사람들이 아무리 평생을 하나님을 섬기고, 평생을 헌신하며, 평생 모은 재산을 교회에 다 갖다 바쳤다고 해도 그건 다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더러운 죄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그런 바보 같은 헌신과 투신이 가능한 것인가? 그래서 복음이 신령한 은사인 것입니다. 신령한 은사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다 열린 은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걸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고전2:12~14)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 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 이니라

보시다시피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에 의해서만 해석이 되어 지고 이해가 되어 집니다. 그 말은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의 하나님 섬김, 그리고 열심 있는 종교 행위는 전부 육적인 이해의 관점에서 나온 가짜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진짜 신령한 것을 받은 자들에게서는 육신의 것이 거두어 진다고 분명하게 선언을 합니다.

(고전9:11)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여기에서의 육신의 것은 단순히 헌신이나 헌금이나 봉사 등의 열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일차적으로 이야기하려 했던 것은 헌금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단순히 성도의 소유를 털어내는 정도가 아니라 성도의 육적 자아 전체를 털어내는 능력과 임무를 갖고 성도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헌금은 성도의 육적 자아의 죽음의 한 증상인 것이지 그것 자체가 무슨 대단한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의해 육적 자아를 많이 털린 사람이 기쁜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할 때 인색함으로 하지 말고 기쁘게 하라는 말은 그러한 의미에서 주어진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게 신령한 복음에 의해 육적 자아를 털리는 과정을 자기 부인이라 하고 그 자기 부인이라는 것은 곧 창세전 언약 안에서, 그리고 십자가 안에서 이미 완료된 성도의 육적 자아의 죽음을 확인해 가는 필연적 과정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입니다. 그걸 확인하는 과정이 신앙생활이며, 자기 부인인 것이며, 그것을 고난이라고 명명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떠난 이 육적 자아를 예수 안에 넣어서 십자가에서 죽여 버리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자아 안에서, 그리고 자아 밖의 세상 속에서 처절하게 경험을 하며 한 발 한 발 육의 부인 과정을 겪어내야 하는 것이 성도인 것입니다. 그건 곧 숨을 쉬는 상태에서 죽음을 맛본다는 말인데 그게 그리 쉬울 리가 없지요. 그래서 성도의 삶이 녹록치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낸다는 사람들조차도 그러한 육적 자아의 죽음이 왜 성도의 삶에 필요한 것인지에 관해 별로 고민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육적 자아의 죽음의 현상들이 혹여 자신의 인생에 나타날라치면 득달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인생을 돕고 있는(?) 하나님의 선전을 촉구하지요. 그건 신령한 은사, 즉 복음을 받은 자들의 삶 속에서 나무의 그림자처럼 자연스럽게 지향성과 방향성으로 나타나게 되는 올바른 증상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며 열심까지 특심인 가짜들을 펼쳐서 보여 주시는 이유는, 예수 믿는 것의 시작과 과정과 결국이 인간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근거하지 않은 인간의 열심은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만한 것으로 카운트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를 쌓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의 예로 제가 늘 드는 사람이 슈바이처입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올곧게 주장하다가 간 신 신학의 아버지입니다. 그럼에도 얼마나 소리 높여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자신의 인생을 다 불 태워 아프리카 원주님들을 섬겼던 사람입니다. 그의 열심 있는 종교 행위는 세계를 울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열심이 바로 신령한 은사에 근거하지 않은 자기 의 세우기의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도 신령한 은사를 잘 공부하여, 과연 우리가 지금 제대로 된 열심을 부리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지 확실하게 분별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게 신령한 은사에 의해 견고케 되는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기 의 세우기와 하나님의 의에 의존하는 하나님의 의 세우기, 그 두 종류의 각기 다른 열심에 대한 경고의 이야기는 창세기부터 일관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복음이 왜 신령한 은사인지, 그리고 그 신령한 은사를 이해하고 수긍을 하여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에 관해 창세기부터 시작을 하여 요한계시록까지 연결을 해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3:4~7)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 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아담과 하와가 뱀의 꼬임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우리는 6절의 자기와 함께 한 남편이라는 어구를 통해 하와가 뱀에게 미혹을 당할 때 아담이 그 곁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쓰인 히브리어 전치사 은 계속 적인 상태를 표현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하와가 뱀의 꾐에 빠져 선악과를 먹을 때 아담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아담이 뱀이 하와를 미혹할 때 말리지 않았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 들었던 아담은 왜 하와가 권해 주는 저주의 실과를 날름 받아먹었는가?

하나님은 성경의 독자인 교회에게 무언가를 설명하시기 위해 아담과 하와를 공범으로 만들어 놓으신 다음에 여자인 하와가 먼저 선악과를 먹게 만드시고 신랑이 그 신부와 똑같은 저주의 상태가 되는 순서로 역사를 경륜하고 계신 것입니다. 경륜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도하고 계시고 이끌고 계신다는 말이지요?

도대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그러한 연출을 하고 계신 것인가?

간단하게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은 죽은 흙에 불과한, 다른 말로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존재들에게 당신의 아들을 신랑으로 주어, 그 아들을 여자와 같은 저주의 상태로 밀어 넣어 그 죽어야 할 여자를 살려내시는 구원의 이야기를 설명해 주시기 위해 에덴동산 위에 그러한 그림을 그려 놓으셨던 것입니다.

 

차근차근 보자고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상태는 부끄러운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기 전까지도 그들은 벌거벗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벌거벗은 그들과 동행하시고 동거하시며 교제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상태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를 받을 상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가 발생을 합니다. 그게 바로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해 입은 사건입니다. 그게 바로 인류의 치명적인 죄였던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벌거벗은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고 자신들의 벌거벗음 위에 스스로의 옷을 덮은 것에 하나님이 진노하셨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인간의 올바른 자 인식은 원래 하나님 앞에서의 벌거벗은 자여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자여야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로서의 치장에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행위와 사유의 능력이 전무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스스로의 선악구조에 의해 선악을 판단하여 자기의 힘과 지혜로 옷을 해 입으려 시도를 하는 것이 자기의 처음 자리를 떠난 인간의 죄인 것입니다. 그걸 히브리어로 휘브리스, 교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수요 예배 때 공부한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빼앗기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피조물들에게, 피조물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사랑과 희생에 의해 비로소 존재하게 된 흙, 먼지였다는 것을 인식시키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존재됨에 그들 스스로의 힘과 능력이 전혀 가입되지 않은 것임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교보재로 동원된 것이 마귀와 아담과 여자와 선악과와 생명나무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들의 선악구조에 의해 벌거벗은 것은 부끄러움이라는 판단을 해 버린 후, 스스로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 입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 가십니다. 그날은 서늘한 날, 즉 심판의 날이라 했지요? 그렇게 자신들의 처음 자리를 이탈하고, 하나님이 있으라 하신 그 처음 자리가 부끄러운 자리이므로 자신들의 힘으로 무언가 더 나은 삶을 추구해 보겠다고 나선 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그들에게로 내려 가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녕 죽이겠다고 말씀하셨던 당신의 약속을 깨시고 그들을 살리십니다.

하나님은 뱀의 미혹에 넘어간 그들이 정녕 죽어야 하지만 여인의 후손이 나와서 그들을 살려 낼 것이라는 원시 복음을 제시하신 후 무죄한 짐승을 죽여서 그 가죽으로 아담과 하와를 덮으십니다. 그게 315절과 21절의 내용입니다. 그건 일차적으로 구원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존재 양식이며 존재 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산 자가 되는 것.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벌거벗음을 모면하는 방식, 즉 은혜의 방식으로 비로소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스스로 인정을 하고 그것을 덮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빈 그릇이라는 피조물 안에 하나님의 생명력이 가득 담겨 둘이 연합을 하여 생기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존재들의 존재양식인 것입니다. 그게 피조물의 제자리입니다. 피조물은 절대로 스스로 옷을 해 입음으로써 부끄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자리는 분명 죽음의 자리이지만 그 죽음의 자리에 하나님의 피가 덮여 생명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아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어 스스로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을 정의하고 판단하여 부끄러움을 스스로 떨어내고 자랑스러움을 추구하려 하는 그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대척점에 있는 마귀의 정체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 악의 총화로서의 마귀가 먼저 창조가 되어, 먼저 타락을 하고, 그가 내려와 하나님의 백성인 아담과 하와를 시험하는 순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의존하는 존재로 서지 않고 스스로의 힘과 지혜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존재로 서려고 하는 그 시도 자체가 바로 마귀의 본질이며 실체라는 것을 성경의 독자인 성도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가 딱 한 번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악과 사건이 구약에서 율법 나무로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스스로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해 입는 자들로 바리새인들이 등장하는 것이고요.

 

계속 갑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처럼의 삶을 동경하여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에덴을 빼앗아 버리십니다. 그리고는 생명나무도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감추어 버리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어차피 아담과 하와 두 사람밖에 없던 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녕 죽으리라의 저주 아래 떨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생명나무를 감추고, 그 길을 그룹들에게 지키게 하고, 하는 등의 복잡한 과정으로 역사를 몰고 가실 것이 아니라 그 지저분한 죄인 둘 죽여 버리시고 다시 시작하시면 되지 않나요?

아니면 생명나무를 아예 없애 버리심으로 그들이 영원히 영생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시면 그들이 주어진 수명만큼 살다가 영벌로 들어가게 될 것 아닙니까? 왜 자신들의 처음 자리를 벗어난 아담과 하와를 그대로 살려두시고 생명나무를 그대로 보존하십니까? 다 죽여 버리고 아예 생명나무 실과를 먹은 자들로 당신의 백성을 다시 만들어 버리시면 되잖아요? 왜 꼭 생명나무 실과를 먹어야 완성이 되는 불완전한 존재로 만드셔야 하냐고요?

 

애초부터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실력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생명나무 실과는 생명나무 측에서 먹일 자를 택하여 침노해 들어가는 방식으로 대상에게 주어집니다. 그게 불가항력적 은혜이며 제한적 속죄인 것입니다.

혹자들이 인간의 자유의지운운하면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만 먹지 않았으면 인류의 역사가 이렇게 복잡하게 흘러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추론들을 내어 놓는데 정말 그런가요?

우리가 에베소서 1장에서 확인 한 것처럼 하나님은 이 역사를 시작하시기 전, 즉 창세전에 당신의 아들과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당신의 백성들의 창조에 관한 것인데, 하나님은 그 창조의 방법으로 당신의 아들의 피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로 말미암아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완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과 아들의 창세전 언약이었습니다. 그 언약이 있은 후 역사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역사는 창세전 언약이 펼쳐져 나타나는 가시적 현장인 것이지요? 이미 완성된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에 의해 하나하나 하나님의 영사기에 찍혀지고 있는 것이 이 역사라면 이 역사 속에서 우발적인 애드립이 용납이 될까요? 절대로 용납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아들과 세워 놓으신 그 시나리오, 창세전 언약대로만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은 우발적인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시나리오 안에 들어 있던 것입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경륜에 절대로 우발적인 것이 끼어 들 수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마귀나 아담이나 하와나 선악과, 생명나무 등은 하나님의 시나리오 지문 속에 모두 기록이 되어 있던 하나님의 작품들인 것입니다. 왜요? 교회의 교훈을 위해서요.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의 제한적 자유의지입니다. 그건 엄밀히 말해 자유가 아니지요. 자유라는 말의 전제는 그것을 누리는 자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주체적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객체란 말입니다.

(11:36)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보세요. 바울이 만물의 존재 목적을 주님이 누구이신가?’를 알리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기록을 하고 있지요? 여기에서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는 어구는 주를 위하여 존재 한다라는 말입니다. 만물은 주를 위하여, 주를 드러내는 자로, 주에 의해 각각의 용도에 맞게 창조가 된 것입니다. 마귀는 마귀의 용도로 쓰시기 위해, 성도는 성도의 용도로 쓰시기 위해 창조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도 똑같은 말을 합니다.

(1:16)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더욱 분명하지요? 여기에서도 역시 만물의 존재 이유를 그를 위하여라고 한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만물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피조물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러한 피조물이 어떻게 하나님과 한 나라에서 존재할 수 있게 되었는가를 드러내는 도구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지 않을 수 있었던 자유의지를 가진 중용의 존재가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는 죽은 흙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감추어 놓지 않으시고 동산 중앙에다가 보암 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게 심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먹으라는 것입니다. 먹고 너희의 실체를 똑바로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해주지 않으면 그렇게 마귀의 세간으로 살다가 마귀와 같은 종국을 맞게 될 그런 존재가 인간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꾐에 속아 선악과를 먹음으로 마귀와 인간의 지향성이 동일하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의 실체는 마귀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산 존재가 되어 영생, 즉 하늘의 생명으로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들을 덮는 방법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벌거벗은 죽은 흙의 상태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흘러나온 하나님의 피가 벌거벗은 성도를 덮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창조 메커니즘인 것입니다.

바로 그걸 가르쳐 주시기 위해 첫 창조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창조를 해 내시는데 어떻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창조가 됩니까? 그럼에도 첫 창조에 그러한 것들이 등장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드세요? 왜 인간이 생명나무 실과를 먹어야만 비로소 존재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나야 하냔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그러한 것들을 살려내고 존재케 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력이 개입하지 않았을 때 이 세상 그 어떤 존재도 혼돈이며 공허이며 흑암일 수밖에 없음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둠을 찢고 빛이 나오는 것이고 물을 밀어내고 뭍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죽음이며 없음인 처음 인간 안에 진짜 생명이 뚫고 들어가 그 죽음을 찢어서 먹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새 창조의 현실을 설명하시기 위해 첫 창조를 그림책처럼 펼쳐 보이시는 것입니다.

(1:1-5)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보세요. 태초에 말씀이신 예수가 홀로 존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창조를 시작하십니다. 4절을 보시면 재미있는 말이 나옵니다. 주님이 하나님과 함께 창조를 하시는데 예수 안에만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 이외에 다른 존재는 생겨나 있더라도 모두 죽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 예수가 나누어 주는 생명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다 죽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것들, 어두움들, 즉 없음 들이 빛의 소용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5절입니다. 난 이미 이렇게 살아있는데 왜 생명이 또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생명나무를 먹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선악과를 먼저 먹어버린 아담의 모습인 것입니다. 존재는 예수의 생명으로만 산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존재 메커니즘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성도라는 사람들도 이 역사 속에서 어두움의 상태, 없음의 상태,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를 먼저 경험하고, 주님이 주시는 빛, 생명의 필요를 절실하게 깨닫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로 창조의 날들이 묘사 되는 것입니다. 저녁부터 출발해서 찬란한 빛이 비치는 아침으로 가는 것이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새 창조의 과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인에서부터 출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바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는 고백을 역사 속에서 하지 못하는 자는 절대로 생명나무 실과를 먹은 자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선악과 따먹은 아담입니다.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감추어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다시 한 번 인간이라는 존재의 실체를 폭로하시고 그들이 산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창세기 322절로 가보세요.

(3:22)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러분은 이 구절을 읽으시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감추시는 이유를 대시는데 그가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에서 영원히 살게 되면 안 되니까 감추셨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영생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에 가는 사람들도 영원히 사니까요. 영생은 하늘의 생명, 즉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 하늘의 존재가 되어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에서는 아예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 생명나무 실과를 감추시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은 죄인으로 생명나무실과까지 따먹고 영원히 살까봐 걱정이 되셔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 즉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자신들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게 된 처음자리 이탈자들은 절대로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은 자, 영생을 소유한 자가 될 수 없게끔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는 것을 강조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감추신 것을 찾아낼 수 있는 자는 없으니까요.

 

잘 보세요. 생명나무실과는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나님 의존자로 사는 자들에게는 축복의 나무입니다. 영생의 나무니까요. 그러나 자기의 주체성과 존재성을 챙기겠다고 선악과를 먹어버린 처음자리 이탈자들에게 있어서 생명나무는 어떤 나무입니까? 저주의 나무입니다. 왜요? 그 나무로 가는 입구를 그룹들과 화염검이 지키고 있다가 그리로 접근하는 자들은 전부 진멸해 버리거든요. 그러니까 생명나무는 축복과 저주 두 가지 면을 동시에 갖고 있는 나무인 것입니다.

어떤 무리들에게는 생명을 주는 축복의 나무가 되면서 어떤 무리들에게는 사망을 가져다주는 저주의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조금 어렵지만 잘 들어보세요. 지금 그것을 선악과와 연결을 시켜 보세요. 누군가가 그룹들과 화염검으로 감추어진 생명나무 실과를 스스로의 힘으로 따먹을 수 있다고 그 나무에 접근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죽습니다. 왜요? 죄인들에게 있어서 그룹들과 화염검은 항상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거든요.

(66:15~16)

15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시리니 그 수레들은 회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를 베푸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하실 것이라

16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 즉 여호와께 살육 당할 자가

많으리니

여호와의 진노, 여호와의 저주, 심판을 화염과 칼로 묘사를 합니다. 에스겔서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와 심판의 칼과 화염이 전편에서 무수히 반복이 됩니다. 이렇게 피조물이 생명나무실과에 스스로 접근을 시도하는 순간 그는 저주와 심판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도가 곧 뭐였습니까?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처럼의 경지로 올라서겠다는 인간의 시도였잖아요?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범죄가 곧 생명나무실과를 스스로의 힘으로 따먹겠다고 시도하는 것과 동일한 범죄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생명나무 실과 은닉사건을 통해 또다시 선악과 사건을 재현해 내시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자들은 반드시 생명나무 실과를 스스로의 힘으로 따 먹겠다고 나설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들은 반드시 죽이겠다는 것이 화염검과 그룹들 안에 의지로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 감추어진 생명나무 실과를 스스로의 힘과 지혜로 따먹겠다고 하는 인간들의 열심을 부정하고 파괴하고 부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공포되는 현장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생명나무 실과, 즉 영생은 하나님 편에서 인간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지 인간 측에서 열심과 노력을 대동하여 스스로 취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역사가 쉬지 않고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펠라기안 주의나 알매니언 주의가 다 그러한 표본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생명나무 실과를 에덴에 두시고 그룹들과 화염검으로 감추신 후 아담과 하와를 동쪽으로 쫓아내십니다. 가인도 동쪽으로 쫓겨나서 에녹 성을 세웁니다. 바벨탑도 동쪽에 세워집니다. 패역한 이스라엘이 동쪽의 바벨론으로 쫓겨납니다. 그들이 다시 동쪽에서 서쪽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 합니다. 에스겔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동쪽의 바벨론으로 쫓아내시면서 하나님께서도 성전을 떠나 어디론가 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11:23)

23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중에서부터 올라가서 성읍 동편 산에 머물고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셔서 성전 동쪽으로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저주 받아 쫓겨나는 자의 궤적을 그대로 훑으면서 가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왜 저주받아 죽어야 하는 자들의 길을 좇아가시는 것입니까?

(11:16)

16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하나님께서 저주를 받아 쫓겨나는 자들의 성소가 되시기 위해, 다른 말로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위해 그들이 가는 저주의 길을 함께 동행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다시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들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명나무 실과는 인간들 스스로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희생으로 거저 주어지는 것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 인간들이 동쪽으로 쫓겨나는 사건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열왕기 서에서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후계자를 세우기 위해 어디에서 어디로 갑니까? 길갈에서 벧엘로 가지요? 그리고 벧엘에서 요단강 동편으로 갑니다. 동쪽으로 동쪽으로, 저주의 길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하늘로 승천을 합니다. 거기에서 엘리야의 영감의 갑절을 받은 자가 서쪽으로 회복의 길을 갑니다. 엘리사는 요단강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사마리아로 갑니다. 동쪽으로 간 한 사람의 희생으로 동쪽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한 존재가 서쪽으로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엘리야와 엘리사는 저주의 동쪽으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동쪽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교회를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저주의 동쪽으로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그 저주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 저주의 자리에서 하늘로 승천해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그 동쪽에서 저주와 심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자들이 서쪽으로 회귀를 하게 되는 구원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기억나세요?

(14:12)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 이니라

더 큰일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창조된, 예수님의 지체로서의 교회의 역사 속 삶을 총칭하는 것이라 했지요? 예수님의 길을 이 역사 속에서 실제 화하여 살아내야 하는 교회의 삶이 더 큰일입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승천으로 말미암게 된 엘리사라는 존재가 갑절의 영감(더 큰일)을 갖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쪽으로 쫓겨난 저주받은 존재들이 생명나무 실과를 먹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귀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저주의 동쪽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 속에 들어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의 저주를 몽땅 받아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생명나무 실과로의 길을 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고, 예수님이 바로 그 생명나무 실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서(47)나 요한계시록(22)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만물을 소성케 하는 생명나무 실과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동쪽에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회귀할 때 누가 그 땅을 지키고 있었지요? 여호와의 사자,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칼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뭡니까? 생명나무를 지키고 있는 칼을 든 그룹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스라엘이 그 사자를 통과합니까? 이스라엘을 이끄는 이가 여호수아입니다. 그 이름은 헬라어로 예수라는 이름입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이스라엘을 이끌고 있고 이스라엘 전체가 할례를 받습니다. 아시다시피 할례는 아닌 다른 존재의 희생의 흔적을 내 몸에 가짐으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내가 살아나는 언약의 징표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할례는 창세전 언약의 축약인 것입니다. 그렇게 동쪽으로 함께 좇아나간 예수 그리스도의 쪼개짐, 할례로 말미암아 동쪽으로 쫓겨난 이스라엘이 생명나무 실과가 있는 약속의 땅으로 회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어때요? 야곱은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 선택이 되어 진 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약속의 후손으로서의 장자의 역할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장자 권을 취득하자마자 동쪽으로 쫓겨납니다. 그리고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때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전쟁을 치르는 겁니다. 그 사자를 이기지 못하면 약속의 후손인 야곱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가나안에 못 들어갑니다.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를 이깁니다. 생명나무 실과를 지키고 있던 그룹과 화염검을 통과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조차도 야곱아 네가 이겼다하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 주십니다. 그가 이긴 자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환도뼈를 부수어 버리신 사건 이후에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환도뼈라는 히브리어는 원래 자손, , 후손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환도뼈가 부수어졌다는 것은 약속의 후손인 야곱의 씨(자손, 후손)가 부수어짐으로 말미암아 동쪽으로 쫓겨나 죽어야 할 야곱이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 약속의 땅으로 복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으로 넘어가 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시면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셨는지 보세요.

(26:26~30)

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0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 가니라

예수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당신의 살과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먹고 마시라고 하시지요? 그러면 무엇이 주어진다는 겁니까? 영생이요.

(6:54)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그런데 그렇게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신 주님께서 어디로 가십니까? 감람산으로 가십니다. 감람산은 올리브 산,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으로 쫓겨나가는 저주받은 이스라엘을 좇아 나가셔서 거하신 성읍 동편 산이 바로 올리브 산입니다. 그러니까 동쪽으로 쫓겨난 저주받은 죽은 흙들이 어떻게 생명나무 실과를 먹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동쪽 행,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저주받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동쪽으로 나가셔서 그 곳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그림으로 그려내면 어떤 그림이 될까요? 생명나무는 죄인들에게는 더 이상 축복의 나무가 아니라고 했지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선악을 판단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에 이르러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자들은 다 선악과 따먹은 죽은 흙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생명나무는 저주와 심판의 나무인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21장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받은 자라고 선언을 했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단두대도 아니고 화형도 아니고 십자가라는 나무에 달려 죽으셨는지 아세요?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나무로 향하려고 하는 모든 죽은 흙들의 저주를 그 나무에서 해결하셔야 했기 때문에 십자가라는 저주의 나무에 맞아 죽으신 것입니다. 그 결과 그 저주의 나무가 은혜의 나무, 축복의 나무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물이 되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령한 은사, 복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저주의 나무에 매달리셔서 그 저주의 나무를 두르고 있던 화염에 타시면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치셨고, 예수님께서 그 저주의 칼에 맞아 아버지와 끊어지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에게 신령한 은사, 복음이 거저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현실을 사도 바울이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3:10~13)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 이니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잘 보세요. ‘선악과 먹지 마라는 명령 안에 축약이 되어 있던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 순종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걸 바울이 10절에서 항상이라는 단어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항상, 완벽하게지켜내야 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 말고 다른 피조물들이 절대로 지켜낼 수 없는 하늘의 원리요, 존재 양식이요, 속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기고만장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겠다는 것은 자신이 율법의 주체가 되겠다는 거니까요.

그것은 아울러 생명나무 실과를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따 먹어 보겠다고 바벨탑을 열심히 건설하는 우매한 인간 건축자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마귀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하신 일을 믿고 그 분의 행하심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고 의존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의로 옷을 입고 구원을 받게 되는 성도의 실존의 올바른 그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도들이 세마포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세마포는 어린양의 피에 빤 옷이라고 하지요? 성도의 옷은 곧 예수의 피라는 말입니다. 그거 말고 다른 옷 입으면 절대 그 혼인잔치에 못 들어갑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나무 실과 따먹으러 갔다가는 나무의 저주를 받아 죽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저주의 나무로 나아가셔서 그 나무의 저주를 받아 죽으시고 그 나무로 가는 길을 여시는 분으로 역사 속에 등장하시는 것입니다. 그 방법 이외에는 인간이 영생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막의 지성소에는 일 년에 단 한 번 대 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들어가 시은 좌에서의

용서를 받아내는 속죄일이라는 형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만이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그룹들과 화염검이 새겨져 있던 성소의 휘장이 언제 찢겨 나갑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때 찢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두루 도는 화염검과 그룹들에게 맞아 죽고 그 길이 선택된 백성, 창세전 언약 안의 성도들에게만 열리는 것입니다.

그게 히브리서 9장 전체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0장으로 넘어가면 그 9장 전체를 간단하게 요약을 해 주는 대목을 만나게 됩니다.

(10:19~20)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그 길과 생명이 바로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과 생명이 어떻게 열리게 되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가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미가가 이렇게 예언을 합니다.

(2:12~13)

12 야곱아 내가 정녕히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정녕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 양떼 같게 하며 초장의 양떼 같게 하리니 그들의

인수가 많으므로 소리가 크게 들릴 것이며

13 길을 여는 자가 그들의 앞서 올라가고 그들은 달려서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좇아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

보세요. 여호와께서 먼저 나가셔서 저주를 받아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 길이 열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생명나무 실과를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점령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유대주의와 율법주의, 인본주의를 마귀의 유혹으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선한 삶과 착한 삶이 하나님의 구원의 완료에 기여가 된다는 그러한 성화주의 또한 마귀의 유혹인 것입니다. ‘착하게 살아라, 안 그러면 구원에서 탈락된다. 열심히 노력해라, 그러면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상을 받을 것이다이게 다 뭡니까? 생명나무 실과로 가는 길을 여시기 위해 당신의 몸을 찢고 화염검과 그룹의 저주를 받아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건 자기부인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격발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과 열심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수없이 등장하는 이기는 자는, 이기는 자는이라는 권고는 무엇을 독려하는 것인가?

(고전 15:57)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김을 누가 주십니까?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걸 믿는 게 이기는 것입니다. 노력해서 이기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요일 5:4)

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보세요. 이김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니면 우리는 영원히 저주 받아 마땅한 죽은 흙일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성도의 믿음인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업적이나 공로를 쌓거나 무언가를 성취해 내는 게 아닙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예수님이 나 때문에 저주받아 죽으심으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을 받게 된 것이라는 복음, 그것을 믿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기기 위해서는 자꾸 지고 부인당하고 해체 당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철장이 개입하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져야 묵시 속에서 이기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러한 복음의 공식은 아랑곳 하지 않고 여전히 인간들의 가능성에 집착하고 인간의 능력을 숭앙하며 역사 속 인간 존재의 미래를 낙관적인 것으로 가르치면서, 고지를 점령하라느니 긍정적 사고를 하라느니 하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 군상들의 생명나무 침공인 것입니다. 그들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그건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고전11:27~29)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 이니라

이 말씀은 성찬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 성도가 성찬 상에서 예수를 먹고 마실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생명나무의 저주가 풀렸다는 증거입니다. 창세기에서 막혔던 것이 고린도서에서는 풀려 있지요? 그러나 그 복음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의 생명나무에로의 접근은 오히려 저주를 받게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생명나무 실과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하는 성찬이라는 종교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열심을 가리켜, 오히려 죄를 먹고 마시는 저주받을 일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은혜의 깊이를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의, 생명나무 실과를 향한 인간들의 욕망과 야심, 자기 주체성과 자기 존재성 챙기기의 일환으로 행해지는 종교행위는 전부 저주받을 죄란 말입니다. 그건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이 세상의 아담군상들의 삶의 방식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 생명나무를 감추어 놓으시고 스스로의 힘과 노력과 지혜를 동원하여 그 생명나무실과를 취득하려하는 인간들의 모든 시도와 노력을 다 부수어 버리심으로 말미암아(그들이 기독교인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인간 존재의 본질과 실상,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 그리고 그 두 존재 사이에는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가 성립이 될 수 있는가를 교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주받을 이 역사와 인생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실력으로, 문명, 교육, 이데올로기, 종교 등의 선행체계와 지식체계를 총동원하여 생명나무에 도달하려고 하는 와중에, 믿음으로 그 속에서 빠져나와, 인간의 육적 열심이나 노력이 아닌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비밀스러운 당신의 백성들을 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과 등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존재원리나 존재 양식, 추구방향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끌려가게 되는 특별한 무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서쪽으로 회귀를 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속에서, 동쪽에서 저주 받은 자의 삶을 먼저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역설이 이해가 가십니까? 이미 구원에 당도한 자들이 그 구원의 현실을 몸으로 삶으로 설명해 내기 위해 이 동쪽의 세상에서 저주받은 동편의 삶을 먼저 살아내야 한다는 역설을.

그러나 성도는 그러한 동쪽의 삶속에서 서쪽의 영광을 믿음으로 보는 사람들이기에 성경이 당신의 백성들이 동편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기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4:15)

15 그러므로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 모든 섬에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

동편에서, 바다에서, 즉 저주의 현실 속에서 소망으로 꿋꿋이 견뎌내는 자들이 바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자들이며,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의 믿음을 볼 수 없습니다. 세상은 그들이 받은 복음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심령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복음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신령한 영역으로 이미 들어와 계신 분임을 잊지 마시고 힘을 내셔야 합니다. 복음을 아는 여러분만이 이 성찬 상의 예수를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으로 사십시오.

 

 

 

 

 

 

 

 

 

 

 

 

 

 

 

 

로마서(21)

빚진 자들, 두 증인의 죽음

 

(1:14~15)

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정당할수록 나는 더 죄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가 한 말입니다. 성령을 받고 그동안 인간들의 선악구조에 의해 잘 못 알고 있었던 죄와 의와 심판의 개념에 대해 책망을 받게 되는 자들에게서 필연적으로 도출이 되는 자기 진단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가치와 영광을 챙겨 갖기 위해 정당함이라는 것까지 이용을 해 먹는 존재인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정당하고 순결하고 깨끗한 겉모습이 해맑게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인간은 자아숭배의 깊은 죄 속으로 더 깊숙이 침잠을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죽은 자들의 세상이라고 명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역사는 죽은 시체인 주제에 산 자인 척을 하는 좀비들의 거대한 무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이 자기 삶의 주체가 되어 살고자 하는 모든 존재를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고 하니까요. 그래서 이 역사는 시체 썩는 냄새와 시체 썩는 더러운 물만 생산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역사에 던져지는 오고 오는 수많은 아담 군상들 중에 그러한 역사와 인생의 실체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존재들이 다 죄와 허물로 죽은 좀비로 태어나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하나같이 좀비처럼 사는 것이 옳은 것이고 정상이며 정당하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눈이 멀고 귀가 먼 이들 중, 창세전에 아들에게 주마고 약속을 하셨던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과 귀를 열어 버리십니다. 그들은 그동안 인간들의 선악구조에 의해 잘 못 알고 있던 죄에 대하여, 그리고 의에 대하여,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깨달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눈은 무엇이 보이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닙니다라는 엉뚱한 대답을 했던 개안된 맹인의 경우처럼 한 번에 세상의 실체를 완전하게 간파할 수는 없지만 서서히 그 세상의 실체에 대해 알아가게 됩니다. 초점이 맞지 않던 카메라의 초점이 점점 맞추어져 그들의 마음속에 선명한 역사의 상이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헛되고 더럽고 어두운 세상에서의 탈주를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소망이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10년 전 쯤, 한 책방의 구석 자리에 앉아서 두 시간 만에 저자 후기까지 다 읽어 버렸던 파울로 코엘료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라는 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왕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한 마법사가 그 나라 백성들이 모두 물을 길어 먹는 우물에 묘약을 풀었습니다.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은 모두 미쳐 버립니다. 이튿날 아침, 물을 마신 백성들이 모두 미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왕과 그 가족은 왕실의 우물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만 미치지 않았습니다. 제 정신인 왕은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서 안전과 공중위생에 관한 일련의 조치를 내립니다. 그 우물을 봉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백성들이 이미 그 우물을 마시고 다 미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왕의 칙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왕이 미쳤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대대적인 하야 시위를 합니다. 왕은 쓸쓸히 왕위를 떠날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왕비가 왕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도 우물로 가서 그 물을 마셔요. 그러면, 우리도 그들과 똑같아질 거예요왕은 아내의 혜안에 감탄을 하며 얼른 가서 그 우물물을 마십니다. 왕이 같이 미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왕은 죽는 날까지 그 왕좌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베로니카라는 그 소설 속의 주인공은 이 세상에 극심한 권태를 느껴서 자살을 시도했던 젊은 여자입니다. 그런데 그 자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녀는 빌레트라는 정신병원에 갇혀 버립니다. 설상가상으로 다량의 수면제 복용으로 인한 심장 질환이 생겨 겨우 일주일의 시한부 인생이 되고 맙니다. 스스로 선택했던 죽음에 성공하지 못한 여자가 주어진 죽음에 순응해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바로 그 기간 동안에 그 정신병원에서 세상으로부터 비정상이라는 진단을 받고 외롭게 빌레트에 갇혀있는 소위 미친 사람들과의 세상살이의 와중에 나오는 대화입니다.

베로니카가 그 이야기를 해 준 제드카라는 사람에게 당신은 미친 것 같지 않다는 말을 하자 제드카가 말을 합니다. ‘아냐 난 미쳤어. 베로니카, 저 빌레트 담장 너머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 알아?’하고 묻습니다. 제드카의 의중을 알아차린 베로니카가 같은 우물물을 마신 사람들이요하고 대답을 합니다. 그때 제드카가 말을 합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 사람들은 자기들과 똑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는 그 담장 밖 사람들을 다 정상이라고 믿지. 그래서 나도 그 우물물을 마신 척하며 살고 있었던 거야. 그러나 이제 난 그들과 다른 미친 사람으로 살 거야빌레트 울타리 밖의 사람들이 저주의 우물물을 마신 미친 존재들임을 아는 제드카는 그들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이 오히려 나은 삶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끊임없이 누가 진짜 미친 자들이냐?’를 묻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이 좀비들의 세상에서 비 정상인이라고 진단을 받고 빌레트에 갇혀 있는 이들이 미친 사람인 것 같으세요? 아니면 이 저주의 우물물을 먹고 모두 다 힘과 복이라는 것에 미쳐 있는 이 좀비들의 세상에서 정상인이라고 인정을 받고 있는 그들이 미친 사람들 같으세요? 쉽게 대답을 못 하시겠지요? 다들 미친 세상에서 똑같은 우물물을 마신 사람들처럼 살고 있으니까요.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가 상정해 놓은 선악구조 하의 기준을 두고 정상과 비정상을 갈라냅니다. 전자에 속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누군가를 후자에 속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 그렇게 후자가 되어버린 자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하고, 결국에는 존재할 수없는 허상의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 이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의 속성 아닙니까? 그래서 모든 인간들이 그 정상이라는 무리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자기들의 전 인생을 걸지요.

아담 안에서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 들 중 그러한 기제론 적 삶의 공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을 받은 사람들만이 그러한 기제론 적 삶의 공식 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정말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미친 사람들처럼 이 세상의 삶의 원리와 반대 되는 쪽으로 끌려갑니다. 그들 속에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말이 아니라 밖에서 띠를 띠우고 어떤 저항할 수 없는 힘이 그들을 끌고 가는 것입니다. 힘이 들지요. 마치 거꾸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연어 떼들의 사투처럼 그들의 삶도 사투로 점철이 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성령의 은혜로 이 미친 세상의 실체를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사투의 현장에서 소망으로 말미암아 기쁘기도 하고 평안하기도 한, 세상이 보기에 진짜 미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빌레트에 갇혀 버리는 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그들만이 하나님 나라에 입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를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빚진 자라는 단어로 함축하여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빚진 자라는 단어, 헬라어 옵헤일레테스는 이미 법정에서, 갚을 것이 있는 죄인으로 확정 판결을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 채무 상환의 일을 소홀히 하거나 거부할 시에는 감옥에 들어가서 응분의 죄 값을 치러야 하는 그런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옵헤일레테스는 어떤 일을 할 의무나 필연성에 묶여 있는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무언가를, 누구에겐가 내어 놓아야 합니다.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본문 15절에 나오는 복음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전도해라, 선교해라라는 권고의 말씀이 아닙니다. 복음을 선물 받은 모든 성도의 삶의 양태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복음은 말이나 글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을 받은 자의 삶으로 녹아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그게 복음을 몸으로 살아내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살아도 되고 안 살아도 되는 그런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연적이며 필수적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한 성도의 역사 속 현실을 어떻게까지 표현을 하는 지 보세요.

(고전9:16)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 이로라

여기에서 부득불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헬라어 아낭케강제, 강압의 의미가 담긴 단어입니다. 그리고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 이로라는 어구는 이사야나 마태나 요한이 하나님을 뵈었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탄식을 했던 바로 그 탄식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탄식은 망자가 지옥 앞에서 내 지르는 탄식입니다. ‘, 이거 어떻게 하지? 난 완전히 망했네하고 처절하게 부르짖는 망자의 외침. 그래서 거기에 우아이(alas)’라는 헬라어 감탄사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 구절 속에서 복음을 받은 자신은 반드시 그것을 삶으로 입으로 토해내게 되어 있는데 만일 그 삶이 내 속에서 터져 나오지 않는다면 나는 지옥 갈 사람이 분명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복음을 살아내야 하는 성도의 삶은 필연성과 당위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도 똑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1:8)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승천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내 증인이 되어라가 아니라 되리라입니다. 그 말은 증인이 되게 하시는 주체가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건 명령이 아니라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그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일어날 일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성취해 내시는 분이니까요.

이렇게 성도는 빚진 자의 삶, 즉 증인의 삶을 반드시 필연적으로 살아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그 빚진 자의 삶에서 반드시 나와야 하는 것, 그에게서 나와 타자에게 전해져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요한계시록으로 가서 하나님의 빚진 자들이 어떠한 삶을 살게 되는 지를 보지요.

(11:1~10)

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이니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여기에 두 증인이 나옵니다. 두 증인은 유대 율법 하에서 증인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정족수를 염두에 둔 숫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당신의 증인으로 세상에 파송되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신 것입니다. 이 두 증인은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하지요? 그게 어디서 나온 겁니까? 스가랴서 4장에 나오는 어절을 그대로 옮겨 온 것입니다. 스가랴 4장에 보면 촛대와 두 감람나무가 나옵니다. 그 두 감람나무는 당시 성전을 재건하고 있던 대 제사장 여호수아와 유대 총독 스룹바벨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4:3,11,14)

3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11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14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

사도 요한이 바로 이 어절들을 인용하여 요한계시록 10장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스가랴 4장에 보면 성전재건을 하고 있는 두 증인에게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이 떨어집니다.

(4:6)

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열심히 성전 재건(스룹바벨 성전)을 하고 있는 두 증인에게 그건 너희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 나의 신에 의해 성취되는 거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동거하게 되는 하나님 나라, 즉 성전은 인간의 힘으로 성취되거나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에 의해 성취되고 완성이 되는 것임을 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거룩한 성전이 바로 하나님의 신부인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이자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들의 수고와 노력에 의해 지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지어진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성전 재건의 현실을 직접 보고 들은 두 증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이 역사 속에서 무엇을 증거 하다가 가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지어질 수 없는 것이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만을 의지하여 그분께 순종해야만 산다는 것을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인간 존재의 존재성과 주체성을 박살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힘의 원리가 진리인 줄 알고 살아가는 이 세상 좀비들은 그들이 불편할 수밖에 없지요. 인간 존재의 가치 실현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올인 하고 있는데 그게 아니라는 자들이 나타나서 찬물을 끼얹으니 불편하지 않을 리가 없지요.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오셔서 유대인들의 그러한 행위들을 부정해 버리셨을 때 예수님을 때려죽이지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 이야기 해 보자고요. 누군가 우리의 자존심을 심하게 긁고 심지어 나라는 존재의 존재성과 독립성과 주체성을 부정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나타났을 때 우리 마음속에 어떤 마음이 들어요? 저 놈만 없으면 살 것 같다는 마음이 안 듭니까? 바로 그 마음이 예수를 죽인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 죽인 자가 맞지요? 내 안에 복음이 들어오게 되면 바로 그러한 육적 자아가 복음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진리의 말씀을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때려죽이고 싶어요. ? 그 복음이 나를 무시하고 하찮게 여기거든요. 매일 넌 죽은 흙이라고 하고 넌 죄인 중의 괴수라고 지겹도록 외치거든요. 그래서 때로는 그 복음의 말씀을 마음속에서 때려죽이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잔치를 벌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진리는 죽지 않아요. 계속 살아납니다. 결국 진리에 의해 육적 자아가 살해를 당하고 예수에게로 연합이 되는 것을 구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11장은 일차적으로 우리 성도 내면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양상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우리가 뭐 그렇게 대단하게 세상에게 죽임을 당하는 삶을 삽니까? 일차적으로 우리 내면에서 우리의 옛 자아가 부인을 당하게 되면 세상이 우리를 미친 사람 취급하는 순으로 요한계시록 11장이 우리에게 실제 화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에 의해 정복당하고 부정당하는 삶을 살면서, 결국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가능성과 가치마저 차압을 당하는 그러한 성도의 삶이 바로 예수만이 길이요 생명이라는 진리를 전하는 복음의 삶인 것이고, 그게 바로 빚진 자들이 내어 놓아야 할 채무상환인 것입니다. 그 현실을 말로 표현해 내는 것이 복음전함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빚진 자들은 자기 안의 옛 성전, 즉 육적 자아의 가능성의 파괴를 경험하면서 새 성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의 의존이라는 필연성을 체휼하고, 그것을 몸으로, 입으로 전함으로 해서 빚을 청산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두 증인의 이야기가 시작이 되는 요한계시록 10장이 아주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10:8-11)

8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두 증인이 증인의 삶을 살기 전에 무엇을 먹습니까? 작은 책을 먹습니다. 그런데 그 책이 입에서는 단데 배에서는 씁니다. 그 말은 그들이 받아먹은 말씀이 뱃속에 들어가서 소화가 되기 시작하여 밖으로 나가게 될 때 쓰디 쓴 일로 화하여 나타나더라는 말입니다. 말씀의 주제는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인데, 그래서 좋아죽겠는데 그것이 삶으로 체휼이 될 때 쓰디 쓴 약처럼 고통스럽더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책 속에 무엇이 기록이 되어 있기에 그것이 뱃속에 들어가서 에너지가 되어 밖으로 나올 때 쓰디 쓴 것으로 바뀌어 나오게 되는 것인가?

(2:8~10)

8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9 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10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 되었더라

두 증인이 받아먹은 그 책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자기 주체성과 존재성을 우상 삼아 살고 있는 세상아, 너희들은 이제 다 죽었다입니다. 그 책을 먹은 자의 뱃속에서 그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소화가 되면 그의 삶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먹은 대로 나오겠지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삶이 그 두증인의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먼저 그 책을 먹은 자 속의 옛 자아가 곡소리 나도록 공격을 당합니다.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현실이 성도의 자아 안에서 실현이 됩니다. 그리고 그 현실이 소화가 되어 밖으로 터져 나와 타자에게 전해질 때 그 타자들 또한 그이를 공격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멀쩡하게 자신들이 정상이며, 옳은 것이며, 훌륭한 것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는 자들에게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을 전하게 되면 세상이 그 말을 전하는 자들을 어떻게 대하게 되겠습니까? 그건 사는 게 아니라 죽은 거라며, 예수가 완료해 놓으신 십자가 은혜만을 붙드는 것이 인류가 살 길이라는 것을, 그렇지 않으면 전부 멸망의 불바다라는 재앙에 던져져 애가와 애곡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전하면 세상이 어떻게 반응을 하겠어요? 미친 사람 취급 하겠지요? 그런데 그러한 두 세력의 싸움이 내 안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복음을 받아먹게 되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이 혼돈입니다. 도대체 어떠한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가 명쾌하게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내 안에 들어온 복음이 불편합니다. 때로는 복음을 받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기도 해요. 그러다가 점점 살아계신 말씀에 의해 한 쪽 세력이 점령을 당하고 잠식을 당하게 됩니다. 인간의 옛 자아가 모든 통점이 다 살아있는 가운데에서 난도질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 속에서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73:14)

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7:15~19)

15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16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17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복음을 받자마자 침 삼킬 동안의 여유도 주지 않고 계속 애가와 애곡과 재앙으로 성도의 시간을 채우십니다. 그게 육적 자아의 해체 과정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으로부터도 고립을 당하고 공격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기 이 육신과 역사와 공간이 살만한 곳이 아니라 빨리 빠져나가야 할 곳임을 알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먼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삶을 체휼케 하십니다.

그렇게 말씀을 받아먹은 사람의 삶 속에서는 옛사람과 새사람 간의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새사람이 승리를 해가면 갈수록 이 육신과 역사는 빨리 벗어나야 할 것임을 깊이 자각할 수 있게 됩니다. 그걸 입으로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때 그걸 들은 세상 사람들이 우릴 어떻게 취급한다고요? 미친 사람 취급합니다. 거기에서 파울로의 소설 속의 어떤 이처럼 나도 우물물을 먹은 사람처럼 연극을 하며 살 거야하면 안 됩니다. 아니 그렇게 놔두시지를 않습니다. 세상이 정상이고 우리가 비정상인 것처럼 오히려 우리를 고립시키시고 소외시키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립과 소외를 경험한 자만이 여기에서 살아 날 수 있는 자입니다. 그게 빚진 자, 증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두 빚진 자, 두 증인이 굵은 베옷을 입고 성전에서 다시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10:11, 11:3)

11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1260일은 마흔 두 달, 즉 이스라엘의 42년 광야 세월로 상징되었던 이 역사와 인생 전체, 혹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류의 전 역사 속에 던져지게 될 하나님의 증인들은 옛 성전, 즉 인간의 가능성을 고수하려고하는 이 아담 군상들의 세상 속에서 새 언약의 현실, 즉 은혜의 현실을 다시 전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을 갖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역사와 인생을 고수하고 수호하겠다는 것이 이 세상 아담 군상들이라면 그것을 부정하고 부수는 이들이 빚진 자, 증인들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역사에다가 초를 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성전, 즉 옛 성전인 이 세상 속에서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죽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베옷이라는 것 자체가 장례식에서 입는 옷이니까요.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한 번이라도 웃으셨다는 기록이 성경에 없는 줄 아세요? 예수님은 이 죽은 자들의 세상 속에서 차마 웃으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초상집에서 어떻게 웃어요? 예수님은 자주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고 자기 백성들의 이름을 부르며 우셨습니다. 어떻게 죽은 자들이 산 자인 줄 착각하고 콩콩 거리며 강시처럼 살고 있는 모습을 보시면서 웃으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뭐 대단한 기쁠 거리를 찾아 낼 수 없어야 합니다. 베로니카처럼 이 세상이 정말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곳임을 알고 이 세상에서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그 두 증인은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계시록 11장으로 돌아갑니다. 그러한 성도의 올바른 역사인식과 올바른 자 인식의 과정을 요한이 성전 척량이라는 소재로 설명을 해 줍니다.

(11:1~2)

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이미 말씀 드린 대로 두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라고 세상에 보내진 하나님의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요한계시록 21장에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지칭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성은 곧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처소, 성전인 것입니다.(고전3:16) 한 마디로 교회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 거룩한 성이 나옵니다. 그 거룩한 성을 하나님께서 척량을 하라고 하시는데 그 거룩한 성이 성전 밖 마당에 해당하는 이방인들에게, 곧 세상에게 짓밟힘을 당합니다. 얼마동안요? 마흔 두 달 동안이요. 그건 전 역사를 지칭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서 40장에서 인용이 된 것입니다.

(40:1-3)

1 우리가 사로잡힌 지 이십 오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십 사년 정월 십일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2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그 땅에 이르러 나를 극히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3 나를 데리시고 거기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 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서 있더니

거룩한 성이 척량이 되고 있지요? 38절과 39절에 보면 거기에 번제물을 씻는 곳과 제물을 드리는 제단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성은 성전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성전이 척량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이 함락 된 후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성과 성전이 이방인에 의해 파괴된 후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성과 성전이 파괴가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성전을 척량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에스겔에게 보여주시는 성전 척량은 어떤 성전의 척량을 말하는 것입니까? 파괴된 성전의 자리에 성령에 의해 선 새 성전, 즉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새 성전은 곧 예수(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요 그 안에서 새 성전으로 재창조되는 하나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걸 천사에게 척량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인간에 의해 세워진 옛 성전, 그러니까 인간들의 하나님 흉내 내기에 의해 세워진 역사는 다 진멸 될 것임과,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 세워질 새 성전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세워질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벨론 포로기에 에스겔에게 환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는 하나님 백성들의 육적 자아 죽이기의 현장인 것이고 그러한 포로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 저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네요.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부르짖는 하나님 절대 의존 자 만들기의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척량이라는 것은 건물을 지을 때에도 필요한 것이지만 건물을 고치거나 허물 때에도 필요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거룩한 성, 성전 안만 척량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인 성도는 스스로의 노력이나 자격이나 자원에 의해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존재케 되는 것임을 알려주시는 것임과 동시에 이 역사 속에서 그러한 은혜의 현실을 체휼케 해 주시기 위해 이 세상 속에서의 육적 자아의 해체 과정을 겪게 만드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흔 두 달 동안 이방인의 뜰은 척량에서 면제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미쳐 돌아가는 이 세상이 진리인양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일반 은혜 아래에서의 심판 유보인 것입니다. 노아 언약에서 나타난 무지개가 바로 그 심판 유보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활이 아직 당겨지지 않고 휴지기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성도 안에서만 보수와 해체와 건설의 척량 작업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도는 이방인들에 의해 짓밟힘을 당합니다. 그들이 마흔 두 달 동안 성전을 짓밟는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이 역사는 미친 좀비들에게는 살만한 곳이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들에게는 죽고 싶은 곳이 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라는 곳이 전부 미치는 약을 풀어 넣은 마녀의 우물물을 먹고 다 미쳐 있다는 것을 맨 정신에 보는 이들이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빨리 탈출하고 싶잖아요? 그러한 역사의 현실을 간파한 전도서 기자가 이 역사라는 현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9:3~5)

3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4 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5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바 됨이라

이 세상 모든 인간이 다 미친 마음을 품고 미친 삶을 살다가 죽은 자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미친 세상이 사자처럼 살다가 가는 그 와중에 개처럼 살다가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개처럼 살다가 간다고 해도 그들은 산 자들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죽은 세상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 세상이 아무리 자기들을 짓밟는다고 해도 그들의 결국을 알고 있는 두 증인은 올곧게 예수의 은혜만을 증거 하다가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증인의 삶을 누가 가장 먼저 살고 가셨나요? 예수님입니다.

(1:5, 3:14)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 하는 증인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증거하고 가셨다는 겁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증거하고 가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빚진 자의 삶을 사셨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마치 채무자처럼 당신의 의무를 수행하고 가신 분입니다. 그렇게 빚진 자로, 증인으로 살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죽기까지 순종하는 완전한 자기부인의 삶을 살다가 가신 것입니다. 그게 두 증인으로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삶의 원형입니다.

그러한 증인으로서의 수난과 희생의 삶이 창세기부터 구체적으로 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 두 증인이 먹은 작은 책을 누가 들고 있었지요? 예수님이 들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그 분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고 있습니까?

(10:1-2, 4:2-3)

1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2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그 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릴 때 무지개가 어김없이 등장하지요? 그런데 그 무지개라는 증인이 어디서 제일 처음 나타납니까? 창세기 9장에 가장 처음 나타납니다.

(9:11-15)

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14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15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 할지라

여기에 보시면 무지개가 내가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의 증인으로 서지요? 하나님은 그 증인을 보시고 당신의 언약을 기억해 내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역사에 던지실 때마다 증인을 세우시는데 그 증인으로 서시는 분이 항상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창세기 1장에서 첫 창조의 사흘이 언약을 담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설명을 해 드린 바가 있습니다. 한 군데만 확인하고 가지요.

(33:20-21)

2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약정과 밤에 대한 나의

약정을 파하여 주야로 그 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21 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파하여 그로 그 위에 앉아 다스릴 아들이 없게

할 수 있겠으며 내가 나를 섬기는 레위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

여기보시면 20절에 낮에 대한 약정, 밤에 대한 약정이 나오지요? 그 단어가 히브리어 베리트, 언약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낮과 밤을 지으시면서 그 속에 언약을 담아 놓으셨다는 것이지요? ‘난 반드시 밤을 멸하고 낮만 있는 세상을 만들어 내고야 말 것이다가 창세기 첫째 날에 담긴 언약이었잖아요? 그때 증인으로 서신 분이 누구입니까? 수면 위에 운행하시던 하나님의 신입니다. 언약, 베리트라는 단어가 가장 확실하게 보여 지는 곳이 어디지요?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시면서 쪼갠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가시는 그림 있지요? 쪼개다라는 단어가 언약이라는 단어와 혼용되어 쓰이는 베리트인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의 언약의 증인은 누구입니까? 쪼갠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가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시내산 언약에서도 하나님이 증인으로 등장하시지요?

 

그러한 언약의 증인으로서의 하나님의 이야기가 가장 이해하기 쉽게 설명이 되고 있는 곳이 창세기 9장의 무지개 언약인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도 잠깐 언급을 했습니다만 무지개라는 단어는 케세트, 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활이라는 단어는 구약 전편에 걸쳐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퍼붓는 도구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9장에서의 그 활은 하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늘을 향하고 있는 활을 세워 놓으시고는 그 무지개를 보고 죄인을 진멸치 않으시겠다는 언약을 기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증인은,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지를 담고 있는 존재여야 하지요?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 증인을 보시고 언약을 기억해 내실 것 아닙니까? 물론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꼭 무엇을 보셔야 기억을 하실 수 있는 그런 노망난 노인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그 증인이 언약을 담고 있어야 한다면 그 무지개에 담긴 언약의 내용이 무엇이겠어요? 하늘이 심판의 활에 맞아 땅의 심판이 모면되는 것입니다. 그게 언약의 증인이신 무지개, 즉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시는 언약의 증인도 역시 십자가에서 쪼개지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고요. 그래서 언약과 할례와 증인(순교자)이라는 단어가 모두 ,쪼개지다, 희생당하다, 순교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같은 맥락의 단어로 쓰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희생에 의해 완전하게 성취가 된다는 것을 언약과 증인이 함께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증인은 자기가 본 것을 그대로 증거 해야 하는 자임과 동시에 그 언약을 몸에 담고 살아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의 최초 원형이 뭐예요? 에베소서 1장의 창세전 언약이잖아요? 하나님 아들의 희생의 피로 인해 점 많고 흠 많은 자들이 거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자로 완성이 되는 것이 창세전 언약 아닙니까? 따라서 그 창세전 언약의 증인들인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점 많고 흠 많은 원수들을 위해 피를 흘리는 자의 삶을 당연히 드러내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빚진 자입니다. 그게 두 증인입니다. 그래서 빚진 자로 살았던 바울이 가는 곳마다 수난을 받고 자기가 세운 교회에서마다 이단이라고 쫓겨나고 두들겨 맞고 했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참 증인이신 예수의 삶이었으니까요. 그걸 전도라고 해요. 그게 빚을 갚는 삶인 것입니다.

바울이 왜 그토록 고난을 받고 있던 로마 교회로 열심을 내어 가려고 했었는지 아시겠지요? 그건 다이너마이트를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것과 흡사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삶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으로 끝이 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이미 죽은 자가 죽음이 왜 무섭습니까? 자기가 죽어야 할 자이며, 그래서 이미 예수 안에서 죽은 자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 필연적 죽음이 자기에게 다가 온다고 해서 두려울 일이 뭐가 있어요? 요즘 일본의 쓰나미로 인해 바닷가 집들이 가격이 엉망이래요. 왜 그래요? 죽기 싫어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필연성을 매순간 체휼하며 사는 게 성도입니다. 그런데 죽음이 두려우면 뭔가 잘 못된 거 아닙니까?

 

여러분은 빚진 자들입니다. 이미 말씀을 받아먹은 분 들이예요. 이제 쓰디 쓴 인생의 여정으로 그 말씀을 소화해 내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능성을 부정당하고 예수만을 꼭 붙드시는 분들이 되시기 위해 죽고 또 죽는 증인의 삶을 살아내셔야 합니다. 이 역사 속에서의 성전 척량은 성도에게만 일어난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예수를 믿었는데 왜 이렇게 힘이 드는가, 투정부리지 마세요. 성전 밖 척량은 잠깐 유보 되었을 뿐입니다. 이제 이 역사의 마지막과 영원 속에서 시행될 그 성전 밖 척량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없는 무시무시한 저주의 척량이 될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냥 열심히 빚진 자의 삶을 사세요. 그러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