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사사기28-미가, 레위인, 단 지파, 그리고 나(17:1~13)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있더니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 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미가가 은 일천 일백을 그 어미에게 도로 주매 어미가 가로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 차로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돌리리라

미가가 그 은을 어미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미가 그 은 이백을 취하여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소년이 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 우거 하였더라

이 사람이 거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서 행하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뇨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10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하여 나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리라 하므로 레위인이 들어갔더니

11 레위인이 그 사람과 함께 거하기를 만족히 여겼으니 이는 그 소년이 미가의 아들 중 하나 같이 됨이라

12 미가가 레위인을 거룩히 구별하매 소년이 미가의 제사장이 되어 그 집에 거한지라

13 이에 미가가 가로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얼마 전에 사랑이 이긴다(Love wins)’라는 책을 출간한 마스힐 바이블 교회의 로브 벨 목사가 그의 책에서 하나님이 단지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수많은 사람을 지옥에 보내 고통받게 할 리 없다고 주장을 해서 큰 파장을 일으켰었는데, 지난주에 풀러 신학교의 리처드 마우 총장이 자신의 블로그에서 힌두교인도 불교도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 천국에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해서 교계에 큰 충격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리처드 마우 풀러 신학교 총장은 남침례 신학교 총장인 알버트 말러도 자신과 같은 입장이라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남침례 신학교의 신학 근간인 원칙개요(abstract of Principles)’ 5항의 인간의 타락조항을 보면, 인간에게는 책임질 나이(Age of accountability)’라는 것이 있는데 그 나이가 12살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질 나이가 되기 전인 12살 이전에 죽은 모든 아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남침례 교회의 신학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책임질 나이가 되기 이전에는 하나님 앞에서 카운트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책임질 나이가 지난 이후의 인간 행위의 가치는 책임이라는 단어로 포장을 할 수 있을 만큼,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카운트가 될 만큼, 위대한 것이라는 전제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꼭 예수를 믿는 믿음만이 구원의 길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수의 십자가와 보혈만이 절대적인 구원 조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요즘 전 세계 기독교의 추세가 내용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보편구원론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 가고 있습니다. 긍정이라는 단어를 아예 자기 사전에 등록을 해 버린 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나 레이크우드 교회의 조엘 오스틴도 보편구원론자입니다. 인간들은 지옥이라는 어두운 곳에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소중한 존재이며, 그러므로 이 역사 속에서의 인간의 행복은 기독교가 추구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지향점이라는 것입니다. 이 보편구원론(universalism)은 어제 오늘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영지주의자들이 판을 치던 초대교회 때에도 있었고, 그 유명한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이나 심지어 칼 바르트까지도 보편구원론을 은근히 지지했을 정도로 편만한, 그야말로 보편적인 인간들의 구원관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보편적 부성인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결국 모든 만유는 보편적 회복(아포카타스타시스)의 자리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어떠세요? 그럴듯하지요? 자존감이 팍팍 살아나는 것 같지 않으세요? 그러나 잘 생각해 보세요. 그러한 보편구원론의 기저에는 어떤 사상이 깔려 있나요? 인간 존재의 소중함, 미국의 건국이념의 핵심인 인간 행복 추구의 당위성, 존재의 목적성 등이 그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인간은 가치 있는 존재이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천국에 어울리는 존재이고, 그토록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들의 행위 또한 책임이라는 개념으로 포장할 수 있을 만큼 위대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 존재 자체를 목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방법이요 수단일 뿐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을 위해 동원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이름으로 일컫는 하나님의백성이며 하나님의영광만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피조물일 뿐입니다. 우리 교회 교인이면 다 외우고 있어야 하는 이사야서 437절을 다시 한 번 보고 가지요.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자라는 말은 하나님이 이름을 주신 자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담아내는 그릇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름을 준다는 것은 이름을 주는 이가 이름을 받는 자의 존재와 내용을 정의하고 결정하고 채운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게 이름을 주는 자의 속성과 내용과 뜻이 이름을 받는 자에게서 드러나게 될 때 그것을 영광(독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내가 내 영광을 위해 창조한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피조물의 존재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과 능력과 속성을 설명해 내는 그릇이 바로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피조물은 자기가 자기 스스로에게 이름을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피조물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정의 하려고 하거나 스스로의 미래를 설정하여 추구하는 것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그게 스스로에게 이름을 주는 행위니까요. 따라서 인간 스스로가 자신들이 정의해 놓은 세상의 이라는 것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인간 역사 전체의 죄악상을 원시적이면서 선명한 그림으로 표현을 해 놓은 바벨탑 건축의 현장에서 인간들의 실체를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이름을 주는 자라고 묘사를 해 놓은 것입니다.  

 

(11: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기에서 이름을 내다라고 번역이 된 어구가 원어대로 직역을 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이름을 새기자, 이름을 주자, 이름을 쓰자입니다. 그게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어 버린 인간들의 타락상입니다. 인간들의 그러한 지향성과 추구 전체가 바로 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벨탑 건설 현장에 내려오셔서 바벨탑을 부수시지 않고 인간들을 흩으신 것입니다.

바벨탑 건축이라는 것은 인간의 죄가 사건화 되어 드러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보다 근본적인 죄의 뿌리는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이 하나님의 역할을 해보겠다고 하는, 그리고 할 수 있다고 믿는 그러한 인간들의 오만불손인 것입니다. 

그렇게 오만불손한 인간들은 자신들의 행위, 즉 바벨탑 건설의 열심을 통하여 하늘에 닿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걸 유대주의라 하고, 율법주의라고도 하며, 인본주의라고도 합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게 되면 신의 존재의 의미 자체가 미미한 것이 되어 자연주의로 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에 있어서의 인간의 책임, 열심 운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열심과 노력이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공덕 사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두시는 장기판 위의 장기 말에 불과한 존재인 것입니다. 장기판 위의 장기 말은 절대 스스로의 비전과 야망을 근거로 움직일 수 없는 존재인 것이며, 이겼다고 자기를 자랑할 수 없고, 졌다고 스스로 비관할 수도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피조물은 그저 하나님의 하실 일을 몸으로 삶으로 표현해 내다가 부르시는 곳으로 가면 되는 존재인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구약의 이스라엘이 신약의 교회를 모형하고 있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교회의 구원 사건을 그대로 모형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이스라엘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착해서? 열심을 부려서? 애굽과는 뭐가 달라도 달라서?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구원받은 겁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자격과 조건이나 됨됨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대문에 발라서였습니다. 그가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라 할지라도 어린양의 피를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지 않은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그 말은 어린양의 피가 아니면 이스라엘이나 애굽이나 다 죽어 마땅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피가 은혜로 가입을 하여 선택된 어떤 무리를 살려내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난 그들이 광야 40년을 살지요? 이스라엘의 40년 광야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도가 살아내야 하는 이 역사와 인생의 비유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역사와 인생의 존재목적이 무엇이라는 말이 되나요?

 

(12:12~14, 26-27)

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 지니라 

26 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27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내가 죽어야 할 너희를 어린양을 대신 죽여 살려 주었으니 이제 자자손손 너희들이 어떻게 산 존재가 되었는지를 증거하는 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기념이라는 말 자체가 과거에 역사가 경험한 것을 각각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그 시대 속에서 현재화하여 받아들이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교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교회는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이며, 그 분의 속성과 능력과 성품이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하는 도구요 방법이요 수단일 뿐인 것입니다. 교회는 그 존재 자체에 목적을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4-7)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교회는 하나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는 역할을 맡은 존재일 뿐입니다. 출애굽기 2장으로 가면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살리셨는지가 명확하게 나옵니다.

 

(2:23-25)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보시다시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의 됨됨이나 자격이나 조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당신의 언약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언약이지요?

 

(15:13~14)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바로 이 약속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실 때에도 그가 뭐가 남달라서 선택을 하신 것이 아니었듯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에도 그들의 자격이나 조건 등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당신의 약속에 의해 이스라엘만 어린양의 피로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애굽의 장자들은 다 죽여 버리십니까? 그것도 약속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종으로 잡고 있던 자들은 하나님께서 징치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셨거든요. 그러니까 출애굽 당시의 애굽은 그로부터 500여 년 전의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역사 속에 드러내기 위해 징치될 자로 세상 속에 보내진 것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약속대로 구원 받을 자로 지어져 보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 거지처럼 살다가 간다고 해서 모두 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이 땅을 살다가 간 것이고 부자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떵떵 거리며 연락을 일삼고 살아도 저주받은 지옥의 자식일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각자의 역할대로 살다가 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옥에 가서 하나님의 엄위와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도록 지어진 자가 있는 것이고 천국에 가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찬송하는 자로 지어진 자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도구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시나리오가 언약으로 먼저 작성이 되고 그 언약의 성취를 위해 그 시나리오에 맞는 배우들이 창조되어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도구에 불과한 자들이 하나님의 부성과 보편적 속성 등을 운운하며 하나님은 이러셔야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실 수 없는 분이다라고 하나님께 훈수를 두는 것이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종교인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한 인본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 복 사상이라는 것이고, 공덕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에덴동산에서 출발하여 전 역사를 아우르며 지금을 관통하여 미래로 흐르는 인간들의 본질적인 죄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부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 폭격을 당한 이들이 저는 죽은 흙, 토기장이의 쓸모대로 몸을 맡겨야 하는 빈 그릇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지옥에 가라 하시면 갈 수밖에 없는 그런 피조물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을 올바른 신앙고백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사사기의 내용이었잖아요? 그리고 그것이 성경 전체의 일관성 있는 내러티브이기도 하고요.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사사기 전체의 결론 부분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까지 공부한 사사기 16장에서 사사의 이야기는 다 끝이 나고 17장과 18장에서 미가라는 인물과 엉터리 레위 제사장, 그리고 그들과 정확하게 같은 욕망으로 살고 있는 단 지파가 등장을 함으로 지금까지의 사사기의 내용이 어떤 내용인지를 요약해 주고, 19장부터 21장까지에서 다시 한 번 율법주의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레위인과 베냐민 지파의 행태를 통하여 이 역사와 인생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고발을 하고 마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왕 삼아 살지 않고 자신들이 이 역사와 인생의 주체가 되어 살고 싶어 하는 세상 왕들의 실체를 폭로시키시고 그들을 어떠한 방법으로 구원을 해 내시는가가 잘 기록이 되어 있는 책이 사사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사사기의 결론 부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왕 대접하지 않고 자신들의 왕 됨을 위해 살던 존재였다는 것을 몰아서 반복하여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7:6)    

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18:1)

1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이때에 거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이때까지 기업의 땅 분배함을 얻지 못하였음이라

 

(19:1)

1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우거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더니

 

(21:25)

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보세요. 사사기의 맨 마지막 절이 이렇게 끝이 납니다.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왕 삼아 살지 않고 선악과 따먹은 하나님처럼의 존재로 존재하는 한 이렇게 처참한 지옥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서 너희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어지는 룻기에서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로 모형 되는 다윗이 준비되는 것을 보여주시고, 사무엘서에서 인간들이 세운 왕, 즉 왕이 없으므로 인간이 스스로 왕이 되고 싶어 하는 그 인간들의 죄악의 현실을 사울로 보여주시고, 그 사울이 기각이 되면서 하나님이 세우시는 하늘의 왕 다윗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사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아의 필연성을 확실하게 붙들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사기의 결론부분에 첫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그의 이름은 미가입니다. 성경은 굳이 그가 에브라임 사람이라는 토를 답니다. 에브라임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던 지파였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 에브라임아, 에브라임아하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가는 이스라엘 전체의 대표로 등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6절을 보시면 미가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라고 하여 이 미가의 이야기를 이스라엘 전체의 이야기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17:5-6)

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렇지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전개되는 미가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읽어야 할 것이며 그 이스라엘이 가리키던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미가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미가의 어머니가 은 1100냥을 잃어 버렸습니다. 당시 은 한 냥이 노동자 나흘 치의 임금이었으니까 1100냥이면 노동자가 4,400일을 일해야 겨우 벌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작은 돈이 아닙니다. 그런 큰돈을 잃어버린 미가의 어머니가 그 돈을 훔쳐간 도둑놈을 저주합니다. 그런데 그 도둑놈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아들 미가였습니다. 미가가 가만히 옆에서 듣다보니 자기 엄마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자기를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가가 그 자리에서 어머니에게 이실직고를 합니다. 저주를 받으면 안 되니까요. 그런데 그 아들의 고백을 들은 어머니의 반응이 가관입니다. 그 저주받을 도둑놈이 자기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곧 태도가 돌변합니다. 본문 2절을 보세요.

 

(17:2)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 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 하였나이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자기 돈을 훔쳐간 도둑을 저주하던 어미가 그 도둑이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금방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을 바꿉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직계 가족은 곧 자기 존재의 확장인 거 아시지요? 아들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저주를 받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얼른 말을 바꾸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미가의 어머니에게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자기의 기도를 듣고 자기에게 손해 입힌 자에게 벌이나 내리는 하나님이고 언제든지 자신이 기도를 바꾸면 그 기도를 듣고 저주를 복으로 바꾸어 내야 하는 여호와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불리는 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를 바꾼 미가의 어미가 은 이백을 은장색에게 주어서 신상을 만들고 신당을 짓습니다. 하나님에게 저주를 복으로 바꾸어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뇌물을 내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뇌물로 제사장의 옷인 에봇과 드라빔을 만듭니다. 그리고는 한 술 더 떠서 자기 아들 중에서 하나를 세워 자기 마음대로 제사장으로 삼습니다. 그러니까 미가의 어미와 미가가 자신들의 복을 위해서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에서 자기들만의 조작된 작은 성전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17:4~5)

미가가 그 은을 어미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미가 그 은 이백을 취하여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

 

지금 미가가 살고 있는 곳이 에브라임 땅입니다. 그 에브라임 땅에 실로가 있었고 그곳에 하나님의 집, 성막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집이 있는 곳에 또 다른 하나님의 집이 패역한 인간들에 의해 지어지고 있는 형국인 것입니다. 이 미가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보세요.

 

(18:31)

31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의 지은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바로 이 이야기가 사사기 17장과 18장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죄라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속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곳에서 나오는 길은 그들 속에 들어 있는 그 조작된 성전 짓기를 폭격을 당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그림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걸핏하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중에 진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별로 없고 다 자기들의 구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집이 있는 실로에 미가의 어미가 따로 신당을 짓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 미가의 이야기가 이스라엘 전체의 이야기라고 했잖아요? 그 말은 이스라엘 전체가 바로 이러한 미가의 형국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결론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들의 대부분이 결국 자신의 복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가짜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님께서 남긴 하나님의 진짜 백성들이 소수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미가가 지은 또 다른 가짜 신당이 단 자손 전체를 장악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진짜 집은 실로에 여전히 있더라는 것으로 이 미가의 이야기가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그렇게 신실하게 당신 백성들을 건져내고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드라빔입니다. 드라빔은 라헬이 야곱과 도망을 칠 때 아버지로부터 훔쳐갔던 가정 수호신입니다. 그 드라빔은 없애 버려야 할 것으로 성경에서 경고되는 것입니다.

 

(왕하23:24)

24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10:2)

대저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 자는 진실치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그 위로함이 헛되므로 백성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이렇게 드라빔은 구복과 점술, 그리고 신탁 행위에 사용되는 인간 형상의 반신상으로 그냥 우상이라고도 불리는 그런 것입니다.

 

(21:21)

21 바벨론 왕이 갈랫길 곧 두 길머리에 서서 점을 치되 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의 간을 살펴서

 

여기에서 우상에게 묻고가 직역을 하면 드라빔에게 묻고입니다. 그러니까 드라빔은 이 세상에서의 구복을 위해 인간들이 만들어 낸 우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제사장의 옷인 에봇과 신상을 만들고 신당을 지은 미가의 어미가, 집 안에 조작되고 왜곡된 작은 성전을 지은 미가의 어미가, 드라빔을 함께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가와 미가 어미의 여호와 신앙은 기실 자기 자신의 구복만을 위한 우상 섬김이었다는 것이 폭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성전 건축 자체가 우상을 짓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당시의 이스라엘 전체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생각할 거 없어요. 우리 자신은 어떠냔 말입니다. 우리는 미가나 미가의 어미처럼 자기의 돈이나 시간, 노동력 등을 내어 놓고 결국 자신의 세상적 유익을 챙기기 위해 이곳에 나와 있지는 않은가 말입니다. 그건 신앙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드라빔입니다. 우상 섬김입니다. 그러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은 소유나 행위가 가치 있는 것임을 전제하는 아주 패역한 짓에 불과한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당신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게 율법주의이며 유대주의이며 인본주의 아닙니까? 그게 사사기 전체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킨 인간들의 추악한 죄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미가 다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수호하는 자들의 대표인 레위인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있는 곳에서 엉뚱한 성전을 건축하고 있는 미가와 미가의 어미, 즉 옛 언약에 속한 이스라엘의 정체가 이제 레위인이라는 성전의 제사장에게서 다시 한 번 그 실체를 폭로 당하게 됩니다. 성경의 점층적이며 반복적인 설명 방법입니다. 이 레위인 소년은 사사기 기자에 의하면 모세의 손자입니다.

 

(18:30)

30 단 자손이 자기를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과 그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이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한글 개역성경이 그 레위 소년을 모세의 손자라고 번역을 해 놓았지만 그때가 사사시대 말기인 것을 감안할 때 그 레위인은 모세의 손자라기보다는 모세의 후손이라고 번역을 해야 더 적확합니다. 그 손자라고 번역이 된 단어 은 손자라기보다는 후손이라고 번역을 하는 것이 더 옳은 단어입니다. 왜 성경이 굳이 그 미가와 미가의 어미를 축약하고 있는 레위인을 가리켜 모세의 후손이라고 기록을 했을까요? 모세는 구약의 율법, 구약의 성전을 대표하는 선지자입니다. 사사기가 지금 모세로 대표되는 구약을 허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성전이 허물어져야 하늘의 성전인 예수 그리스도가 그 자리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원래 레위인은 여섯 개의 도피성을 포함한 40여 개의 성읍에 흩어져 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의 열 한 지파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레위인이라는 사람이 여기저기 거처를 찾아서 떠돌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레위인은 약속의 땅에서 기업을 못 받는 대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면서 다른 지파들로부터 생활비를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액수가 보통 다른 지파 사람들의 평균 생활비의 4배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일만을 해야 했던 레위인들은 당시 다른 지파 사람들보다 훨씬 윤택하고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레위인은 거할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고 있는 것입니다.

 

(17:8)

이 사람이 거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서 행하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우리는 여기에서 이스라엘이 겉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섬기는 척 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만홀히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지키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위인은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만 하도록 바쳐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죽어도 하나님 앞에서 죽고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바쳐진 레위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만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여기저기 떠돌면서 자기 힘으로 먹고 살 궁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총체적 타락입니다. 복에 기갈이 들린 미가가 레위인을 돈으로 삽니다.

 

(17:10)

10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하여 나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리라 하므로 레위인이 들어갔더니

 

연봉 은 열 냥에 양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제공한다고 하니까 레위인이 넙죽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먹을 것을 위해 가짜 성전의 제사장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돈 놓고 돈 먹기입니다. 회중은 자신들이 원하는 복을 하나님에게 중재하여 얻어내 주는 샤먼을 세우려고 하고 그 자리에 세워진 샤먼은 회중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공생하는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 아닙니까? 그리고 그건 사도 바울이 지적한 초대 교회의 모습이기도 했고요. 엄밀히 말해 그건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무당굿이지요.

돈에 고용이 된 제사장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겠습니까? 그리고 돈으로 제사장을 고용한 사람이 무슨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겠습니까?

미가가 레위인을 자신의 사설 성전에 고용한 뒤 뭐라고 하는지 보세요.

 

(17:13)

13 이에 미가가 가로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그 전에는 신당과 신상과 에봇을 지어놓고도 자기 형제 중 하나가 가짜 제사장 노릇을 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는데 이제 진짜 레위인이 제사장이 되었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이제 자기가 원하는 복은 모조리 자기 것으로 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인간들이 고안해 낸 종교의 모습인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세상의 복을 얻어내기 위해 성전까지도 조작해 내는 미가와 미가의 어미, 그리고 자신의 안일을 위해 가짜 성전에서 가짜 제사장 노릇도 마다하지 않는 레위인, 모두 다 힘의 원리로 돌아가고 있는 이 세상 속 아담 군상들의 전형입니다.

 

이제 18장으로 넘어가면 17장의 그 모든 아담들의 총화로 단 지파가 등장을 합니다. 그 단 지파 역시 힘의 원리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합니다. 단 지파가 자기들이 거할 땅을 찾기 위해 이러 저리 다니다가 그 미가의 집 레위 제사장을 만납니다. 단 지파는 레위인에게 자신들의 형통을 점쳐 달라고 합니다. 미가와 똑같은 모습이지요? 제사장을 드라빔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18:5)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보아서 우리의 행하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보시다시피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신들의 복과 형통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레위인이 좋은 말을 해줍니다. ‘평안히 가라, 형통할 것이다그런데 꼭 그런 가짜들의 말은 맞아 떨어집니다. 단 지파의 정탐 군들이 라이스라는 좋은 땅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그 땅을 치러 올라가는 도중에 자기들에게 형통을 빌어준 제사장을 꾀어냅니다. 신통한 사람이라 생각이 되었거든요. 쉬운 말로 50명 교회 목사 할래? 5,000명 교회 목사 할래?’하고 물은 겁니다. 그랬더니 제사장이 기쁘게 5,000명 교회로 옮겨 갑니다.

 

(18:17~20)  

17 땅을 탐지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그리로 들어가서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취할 때에 제사장은 병기를 띤 육백 명과 함께 문 입구에 섰더니

18 그 다섯 사람이 미가의 집에 들어가서 그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취하여 내매 제사장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

19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 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 한 지파, 한 가족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어느 것이 낫겠느냐

20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취하고 그 백성 중으로 들어가니라

 

힘으로 힘을 빼앗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에봇과 드라빔과 우상까지 다 빼앗아 갑니다. 오직 목적은 하나 복과 형통입니다. 그랬더니 미가가 이웃 사람들을 모아서 단 지파를 쫓아갑니다. 힘을 규합하여 자기의 복을 다시 쟁취해 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가보니까 단 지파가 의외로 숫자가 많습니다. 그래도 미가가 일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따집니다. 그러한 미가에게 단 지파가 한 마디 던집니다. ‘너 한 마디만 더 하면 죽여 버린다기가 질린 미가와 그 일행은 말없이 돌아섭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정의고 뭐고 없어요. 힘이 최고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처럼 강한 것이 정의인 것입니다. 니체의 초인 사상도 별반 다를 바 없고요. 힘을 추구하기 위해 힘을 동원하고 그 힘을 가진 자가 계속 힘을 축적해 나가면서 약자들을 밟는, 빈익빈 부익부의 세상. 이게 마귀의 세상인 것입니다.

 

(18:22~26)

22 미가의 집을 멀리 떠난 때에 미가의 이웃집 사람들이 모여서 단 자손을 따라 미쳐서는

23 단 자손을 부르는지라 그들이 낯을 돌이켜 미가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가지고 왔느냐

24 미가가 가로되 나의 지은 신들과 제사장을 취하여 갔으니 내게 오히려 있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어찌하여 나더러 무슨 일이냐 하느냐

25 단 자손이 그에게 이르되 네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리게 말라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네 생명과 네 가족의 생명을 잃게 할까 하노라 하고

26 단 자손이 자기 길을 행한지라 미가가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돌이켜 집으로 돌아갔더라 

 

어떠세요? 무슨 조폭 영화 같지 않으세요? 이렇게 단 지파와 레위인의 이야기가 끝납니다. 결국 나중에 단지파도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게 끝이에요. 

그러면 뭡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뭐예요? ‘그래서 너희들은 다 죽었다가 끝인가요? 아닙니다. 미가나 미가 어미나 레위인이나 단 지파나 모두 다 우리의 현재의 모습의 투영입니다. ‘과거에 그랬었다가 아니잖아요?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나의 구원, 나의 천국, 나의 지옥 모면하기, 나의 소원 성취, 나의 형통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나요? 그렇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우리 현재 모습의 투영이라면 이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버리면 안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또 다시 죄인의 모습을 뒤집어쓰고 이 땅으로 오신 메시아의 모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레위인은 이스라엘의 맏아들들을 대신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유다 베들레헴으로부터 맏아들 하나가 우상을 섬김으로 죽어 마땅한 미가의 집으로 찾아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레위 소년은 율법주의와 유대주의, 인본주의와 성공주의, 기복주의와 자연주의로 똘똘 뭉친 죄인을 모형 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러한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유다 베들레헴으로 오신 진정한 하늘의 레위인, 참 제사장, 진짜 맏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삼손을 포함한 사사기의 사사들이 전부 추악한 이스라엘의 실체를 함의하고 있음과 동시에 그들을 구원해 내는 메시아의 모형으로 쓰인 것처럼 유다 베들레헴에서 오는 제사장에 의해 죽어야 할 자들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 레위인을 굳이 모세의 후손이라고 밝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신약의 안경으로 바라볼 때 율법의 대표 격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광야에서 죽는 것으로 그의 역할을 마감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 모세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중보의 역할을 하며 메시아의 모형으로 살았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켜 나와 같은 선지자,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레위인은 멸망 받아 마땅한 율법의 상징이기도 하면서, 그렇게 멸망 받아 죽어야 할 미가와 단 지파를 살리는 메시아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인 때문에 미가의 집에 산당이 헐리고 신상이 제거되며 에봇과 드라빔이 사라집니다. 미가가 하나님의 집이 있는 곳에서 사설로 세워 놓은 조작된 성전이 부수어 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미가의 자기부인인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힘을 추구하는 데에 필요한 방법과 수단들을 다 빼앗겨 버리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그걸 갖고 하나님 앞으로 가면 미가는 죽습니다. 그런데 레위인의 개입으로 그것을 털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던 단 지파가 베들레헴에서 온 레위인 제사장에 의해 마침내 거할 땅을 찾아 약속의 땅 거민이 되는 것입니다. 레위인에 의해 죽어야 할 단 지파가 형통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사기가 어떻게 시작이 되었습니까? 유다지파가 선봉에 서서 마치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을 대표로 수행하는 것처럼 시작이 됩니다. 그렇지요? 그 서론의 이야기가 이 결론 부분의 유다 지파의 레위인과 에브라임 지파와 단 지파의 이야기로 다시 반복 되는 것입니다. 인클루지오(inclusio) 구조입니다.

 

(1:1-3)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 갈 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이렇게 시작이 되어서 무려 21절까지가 다 유다 지파의 전쟁 이야기입니다. 제가 사사기 강해 초기에 이 부분을 설명 드리면서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가 사사기 서론에 함께 등장하는 이유가 뭐라고 했지요? 성경 전체에서 시므온 지파는 저주받아 흩어져야 할 지파로 나오는데 그렇게 죽어야 할 시므온이 유다의 기업에 참여하여 은혜로 살아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가 함께 등장하는 것이라 했습니다.(49:5~7) (19:1) 사사기 전체의 프롤로그지요.

 

사사기는 그렇게 유다 지파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기업에 참여하여 거저 구원을 받게 되는 역사 속 시므온들의 구원이야기 임을 서론에서 밝히고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한 역사 속 시므온들의 구원 이야기가 사사기 서론과 결론에서는 단 지파와 유다 지파의 이야기로 설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의 144,000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단 지파, 그것은 저주 받아 멸망 받아야 할 피조 세계의 죄를 총칭하는 상징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단 지파의 실상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오염(macula)의 형태로 들어 있는 인본주의의 더러운 잔재인 것입니다. 그러한 단 지파들이 대 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장자, 하늘의 레위인에 의해 구원을 받는 이야기가 사사기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의 이야기로 시작이 된 사사기가 134절에서 단 지파의 고립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사기 134절로 가면 유독 한 지파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얻지 못합니다. 약속의 땅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지파가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결론 부분에 등장하는 단 지파입니다. 서론에서 약속의 땅을 차지하지 못한 단 지파가 결론 부분에 당도해서도 여전히 기업을 얻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습니다.

 

(1:34)

34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 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고

(18:1)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이 때에 거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이때까지 기업의 땅 분배함을 얻지 못하였음이라

 

단 지파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믿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전쟁은 각 지파의 힘과 능력에 의해 치러지던 전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여 전쟁을 치르게 되면 이스라엘이 백전백패를 했던 전쟁입니다. 그런데 단 지파가 사사시대 마지막까지 기업을 못 차지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바꾸면 단 지파는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존하지 못하고 자기들의 힘과 세상의 힘을 의지한 사람들이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멸망 받아 마땅한 아담 군상의 죄인 것입니다.

제가 전에 요한 계시록 7장의 144,000을 설명하면서 그 이스라엘의 열 두 자파의 목록에 단 지파가 빠지고 엉뚱한 므낫세 지파가 들어가 있는 이유를 말씀드리면서 그 이유를 어떻게 말씀 드렸나요? 단 지파는 창세기의 야곱의 유언에서 드러난 것처럼 이스라엘 지파 안에서 뱀의 역할을 맡도록 투입이 된 지파라고 했지요?

 

(49:16~17)

16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17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보시다시피 단은 이스라엘 안으로 투입이 되어 뱀의 역할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지파입니다. 그 말은 단 지파 안에 이스라엘의 죄가 모두 담겨 있다는 말과 꼭 같은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 지파를 통해 이스라엘의 정체를 폭로 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반드시 그 죄를 제거해 낼 것임을 아울러 암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단 지파가 제거가 되고 거기에 엉뚱한 므낫세 지파가 들어감으로 해서 도저히 이스라엘의 대열에 합류할 수 없는 므낫세 지파가 영원히 면목 없는 구원에 감사하고 찬송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므낫세는 죽어야 할 단 지파의 부활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죽어야 할 우리 안의 단 지파가 유다 베들레헴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얻고 므낫세로 부활하여 하늘의 기업을 얻게 되는 이야기가 바로 사사기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결론이 단 지파의 기업 확보로 맺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자기가 세운 성전을 헐리고, 자기가 만들어 낸 에봇을 빼앗기고, 자신이 생산해 낸 드라빔을 탈취 당하는 시간을 겪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구원 여정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복 운운하며 너스레를 떨 입장이 못 되는 것입니다. 구복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형통을 위해 공덕을 쌓는 것은 불교나 무속 신앙인들이 하는 짓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행위를 가치 있게 쳐주거든요. 기독교는 하나님 측에서 일방적으로 쏟아 부으시는 하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을 깨닫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지 힘을 얻어내어 하늘을 정복하겠다는 오만불손한 자리로 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과 윤리 도덕의 경쟁을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의 가치와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 되지도 않는 선을 만들어 내는 것이 기독교의 목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에게 털리는 삶이 진짜 복 받은 삶임을 가슴깊이 경험하며 체휼하고 결국에는 예수님의 손만 꼭 잡고 올라가는 은혜와 긍휼의 총화인 것입니다.

지옥이 없다고요? 인간은 너무 소중해서 지옥에 보내면 안 된다고요? 설사 지옥이 있다 해도 인간의 선한 행위가 그 지옥을 모면하게 해 줄 수 있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모든 인간은 전부 다 미가이며 미가 어미이며 레위인이며 단 지파이며, 에브라임이며, 시므온입니다. 그들은 모두 다 지옥에 보내져서 하나님 없는 삭막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이 없는 곳은 모두 지옥입니다. 그러니까 지옥으로 보내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우리 성도가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주인 삼아 살던, 자신을 왕 삼아 살던, 진짜 왕을 왕 대접하지 않는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살던 그 삶을 폭격당하고 하나님의 도성으로 입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반드시 이 역사 속에서 지옥의 처절함을 맛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인생의 결국을 조금이라도 경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입에서 부르짖음이 터져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 여기서 나가게 해 주세요

 

지옥은 불이 소금처럼 부어지는 그런 정도의 고통을 겪는 곳이 아닙니다. 그건 불교의 지옥관입니다. 불교의 무간지옥 사상이 기독교에 들어와 엉뚱한 지옥을 상상하며 거기에 가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 신앙생활이 되고 말았는데, 그건 역시 의 안위를 걱정하는 우상 섬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역사를 사시면서 차라리 내 몸에 불을 붙이실지언정 이 죄악의 심연에서 어서 빨리 구해주세요.’라는 고백을 하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차라리 야차를 시켜 내 눈 알을 뽑으시던지 내 혀를 꺼내어 마차를 끄시던지 내 껍질을 벗겨 지옥의 벽지를 삼으시라고, 그러나 이 지긋지긋한 죄와 죄의 배설물 속에서는 건져 달라는 그런 부르짖음이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셔야 합니다. 그런데 지옥이 없다고요.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그 지옥이 없다고요? 그 사람들은 인생과 역사의 목적과 실체에 대해서도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내가 미가이고 내가 미가 어미이며 내가 바로 육신의 안일에만 관심 있는 레위인이며 내가 힘으로 세상을 짓밟으려 하는 단 지파임이 폭로되는 그 현장이 우리에게 지옥으로 인식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아직 성령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격하게 책망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그 성령의 책망이 지옥인 것입니다. 지옥불은 성령의 불입니다.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 그 성령의 불을 받은 사람은 영원 속에서 은혜의 성령과 함께 동거하게 되는 것이고 이 역사 속에서 성령의 불을 받지 못한 사람은 영원 속에서 하나님 없는 처절한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내 삶이 왜 이렇게 지옥 같으냐?’는 탄식은 거두어들이시고, 성령의 불에 활활 타버리세요. 겪어 내시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게 복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지옥을 영원히 살게 될 뻔한 우리를 위해 베들레헴에서 오신 제사장  예수가 그 지옥을 사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소망을 가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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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07
    Oct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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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기28-미가, 레위인, 단 지파, 그리고 나(삿17:1~13)

    사사기28-미가, 레위인, 단 지파, 그리고 나(삿17:1~13) 1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있더니 2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 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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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04
    Oct 2013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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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주설교원고 / 사사기27-삼손,죽음으로 들릴라를 사랑하다(삿16:1-4, 28~31)

    사사기(27) 삼손, 죽음으로 들릴라를 사랑하다 (삿16:1-4, 28~31) 1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2 혹이 가사 사람에게 고하여 가로되 삼손이 여기 왔다 하매 곧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종용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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