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사사기(27)

삼손, 죽음으로 들릴라를 사랑하다

 

(16:1-4, 28~31)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혹이 가사 사람에게 고하여 가로되 삼손이 여기 왔다 하매 곧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종용히 하며 이르기를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 하였더라

삼손이 밤중까지 누웠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 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 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 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29 집을 버틴 두 가운데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30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31 그의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 시체를 취하여 가지고 올라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 아비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 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년을 지내었더라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삼손과 들릴라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영화로, 연극으로, 뮤지컬로, 심지어 소설과 동화로도 각색이 되어 불신자들에게까지 인기를 끌고 있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그 어떤 장르의 작품에서도 삼손과 들릴라의 이야기를 성경의 진의대로 풀어내지를 못한 것 같습니다. 어줍지 않은 권선징악이나 상선벌악의 교훈을 목적으로 한 작품에서는 삼손의 여성편력에 집중을 하여 삼손의 지저분한 삶이 난도질을 당하는가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한 삼손을 하나님께서 다시 사용하심으로 블레셋 방백을 수천 명을 죽이는 데에 사용하셨으므로 우리도 그러한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식의 해석도 분분합니다. 아닙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이며, 십자가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사사기 14장과 15장을 보면서 삼손과 딤나의 블레셋 여인과의 혼인에서 시작이 되는 구속사의 이야기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메시아를 모형하고 있는 사사 삼손이 이방 여인과의 혼인을 통해 결국에는 그 불가능하고 무력한 이방 여인에 불과한 이스라엘을 살려내는 구원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삼손 이야기의 개괄적 내용이었지요? 오늘 우리가 공부할 사사기 16장은 그 14장과 15장의 이야기가 좀 더 강화되면서 반복이 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오늘 본문인 16장 첫 세절에 16장 전체, 아니 삼손의 이야기 전체가 아주 함축적으로 요약이 되어 있습니다. 삼손이 블레셋의 땅인 가사에 내려가서(그곳은 삼손이 죽는 곳) 그곳의 창녀와 잠을 잡니다. 1절의 들어가다는 히브리어 라는 단어를 의역한 것인데, 원래 그 단어는 먹다, 가지다, 덮어버리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기생이라고 번역이 된 자나라는 단어도 원래 창녀, 간음하는 여자라는 뜻입니다. 자나라는 단어는 우상을 섬기는 자라는 의미로도 종종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사 삼손이 아무렇지도 않게 세상과 간음을 하는, 자타가 공인하는 창녀를 덮어서 먹어 버림으로 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시면 삼손이 홀홀단신 블레셋의 수도라 할 수 있는 가사로 내려가서 창녀의 집으로 들어가자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죽이기 위해 성읍 문에 매복을 합니다. 그 성읍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번역본인 70인 역에서 폴리스라고 번역이 되는데 그 단어가 계시록 18장에 여러 번 나옵니다.

 

(18:9-10)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10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여기에서 큰 성 바벨론이 바로 폴리스입니다. 그런데 그 큰 성 바벨론은 음행을 하고 사치를 하던 땅의 왕들의 성읍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힘과 지식을 숭앙하는 집단의 성읍이 바로 바벨론이라는 성읍인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그 성읍의 문에 매복을 하고 있지요? 삼손이 갑자기 그 성읍의 문을 뽑아서 헤브론으로 옮기잖아요? 성읍의 문은 그 성읍 전체를 함축하고 있는 상징입니다. 그 성읍의 문이 뽑혔다는 것은 그 성읍 전체가 멸망했다는 뜻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삼손이 성읍의 문을 뽑아 버렸다는 것은 그 블레셋 성읍이 삼손에 의해 박살이 났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 문이라는 단어 솨아르라는 단어가 창세기에 연거푸 두 번이 나오는데 그곳을 찾아보면 왜 삼손이 오늘 본문에서 블레셋이 사사인 자신을 죽이기 위해 매복하고 있던 성읍의 문짝을 뽑아다가 이스라엘의 땅인 헤브론으로 옮기는 장면이 연출이 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9:1)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그 문이라는 단어가 제일 처음 등장하는 곳이 바로 멸망당할 소돔의 성문을 가리키는 곳입니다. 그 문은 바로 뒤의 22장에서 메시아에 의해 정복당할 문으로 기술이 됩니다.

 

(22:16~17)

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이 장면은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 위에서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의 가슴에 칼을 꽂으려 했던 그 장면 바로 뒤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거기에는 죽어야 할 자들 대신에 죽임을 당하게 될 어린양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무죄한 제물의 희생으로 죽어야 할 믿음의 후손(아브라함 포함)들이 살아나게 되는 십자가의 현실이 그 산 위에서 펼쳐졌던 것입니다. 그렇게 무죄한 어린양의 희생으로 죽어야 할 자가 구속이 되는 십자가 사건이, 메시아에 의해 대적의 문이 뽑히는 사건, 즉 하나님의 승리를 가리키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그 가사라는 곳은 메시아가 죽는 이 세상 바벨론 성읍을 모형하고 있는 것이고(삼손이 거기서 죽는다)삼손은 그 음녀 바벨론과 한 몸이 되는 십자가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승리를 안겨드리는 메시아의 모형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음녀 바벨론과 한 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가 죄인의 자리로 내려 오셔서 그들의 죽음을 대신 죽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삼손의 이야기 마지막이 그 블레셋의 집, 즉 블레셋의 성전이 무너져 내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블레셋의 성과 함께 메시아의 모형인 삼손이 함께 죽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 안의 블레셋, 즉 음녀 바벨론을 부수시기 위해 메시아가 바벨론이 되셔서 그들과 함께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승리인 것입니다.  

 

(16:29~30)

29 집을 버틴 두 가운데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30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여기에서 삼손이 무너뜨린 이라는 단어 바이트궁전, 성전, 휘장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 단어가 다니엘서에서도 똑같이 쓰인 적이 있습니다.

 

(4:30)

30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느브갓네살 왕이 자신이 세운 바벨론 왕국을 나의 도성이라고 부릅니다. 그 도성이라는 단어가 삼손이 박살을 낸 블레셋의 입니다. 그리고 그 단어는 성전으로도 번역이 되고, ‘휘장으로도 번역이 됩니다. 따라서 삼손은 지금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가로 막고 있는 장애물, 인간들의 하나님 흉내 내기, 인본주의, 하나님처럼 살기, 유대주의, 율법주의(성전)를 부수는 자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몸을 함께 부수어서 그것들을 죽여 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승리라는 말입니다.

 

(11: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예수님이 못 박히신 곳이 어디지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곳을 큰 성, 즉 바벨론이라고도 하고,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합니다. 거기에서 예수가 죄가 되셔서 죽으심으로 바벨론이, 소돔이 애굽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안의 바벨론, 성도 안의 소돔, 성도 안의 애굽에 국한하여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게 하늘의 승리자의 승리 비결입니다.  

그래서 창녀를 덮은 삼손이 갑자기 그 대적의 문을 뽑아들고, 대적의 땅, 즉 바벨론 성읍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의 헤브론으로 승리의 행진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자기를 비워 창녀와 한 몸이 됨으로 그 창녀가 하늘의 신부가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필코 이루어 내실 하나님의 승리의 내용이란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삼손도 모형일 뿐 실체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오실 자의 앞으로 먼저 달려가는 삼손의 그림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뒤이어 누가 오세요? 삼손으로 모형 되었던 실체이신 예수가 똑같은 모양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삼손은 지금 예수를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8장으로 가보시면 조금 더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왕상18:30~38)

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32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만한 도랑을 만들고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 그리하라 하여 세 번 그리하니

35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 하옵소서 내게 응답 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갈멜산의 전투 장면입니다. 잘 보시면 그 갈멜산의 전투가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삼손의 이야기와 많이 닮아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폭풍의 신이요,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가 850명이나 될 정도로 하나님 앞에 패역한 상태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창녀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진멸 당해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방신과의 간음으로 마땅히 모두 진멸을 당해 죽어야 할 그 곳에 엘리야라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30절을 보시면 그 때의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 제단도 다 허물어 버린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자들이 하나님을 아예 마음속에서 지워 버린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 허물어진 제단을 다시 세우는 자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그 제단을 무엇으로 다시 수축을 합니까?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여 제단을 쌓습니다. 31절이 그것을 이스라엘의 회복이라고 기술을 합니다. 그렇게 처참하고 음란하게 허물어진 이스라엘을 먼저 간 하나님의 선지자가 다시 회복을 시켜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떻게 회복이 됩니까? 제물과 제단에 물이 가득 부어진 상태, 즉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열심과 권능으로 제물에 불이 붙어 그 제물이 열납이 되는 그러한 모양으로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선지자의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지자 이스라엘이 은혜의 단비를 맞고 회복이 되는 그런 그림인 것입니다.

37절을 보시면 엘리야가 기도를 하는데 그 기도의 내용이 이러합니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 하옵소서 내게 응답 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창녀 이스라엘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포하시라는 겁니다. 그 기도 속에는 이스라엘의 불가능함과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이 전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물에 푹 젖은 제물에 불이 확 붙었습니다. 그게 승리인 것입니다. 인간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이 완전히 폭로가 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과 은혜가 오롯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승리인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모두가 도륙을 당합니다. 승부가 난 것입니다. 어떻게요? 무죄한 제물의 희생으로 창녀 이스라엘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무너진 단이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엘리야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늘의 왕에 앞서 이 세상에 보내어지는 왕의 전령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변화 산에서 엘리야를 보고 내려오는 제자들에게 엘리야가 왔는데 세상이 알아보지 못하고 죽였다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엘리야가 오긴 왔는데 이스라엘이 기대하던 모양으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엘리야는 메시아의 모형으로 보내어지는 사람이라고 했지요? 따라서 메시아도 그렇게 세상에게 맞아 죽어 그를 죽인 자들을 살리는 방식으로 구원을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17:9~13)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라기의 예언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올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변화산 위에 엘리야가 나타난 것입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때 제자들이 왜요? 엘리야가 오면 메시아가 오실 것이고 그때가 되면 하나님 나라가 펼쳐질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가 엘리야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전체가 기뻐 뛰어야 할 판인데 왜 주님은 입을 다물라고 하십니까?’하고 물은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을 해 주십니다. ‘엘리야가 오긴 오는데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불 말과 불 수레를 끌고 나타나서 너희들의 모든 대적을 다 물리치고 너희들만 살기 좋은 그런 나라를 만들어 주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단다. 엘리야는 사람들에게 홀대를 당하고 결국에는 맞아죽어 그를 죽인 자들을 살리는 모습으로 오는 거야. 그가 바로 세례요한이었는데 너희가 죽여 버리지 않았니? 내가 바로 그렇게 세상에게 맞아 죽고 너희를 살려낼 거란다.’ 이게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 그리고 엘리야는 예수님의 모형으로 예수님 앞을 달리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열왕기상 18장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승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인지가 밝게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 즉 제물의 죽음으로 창녀가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리게 되는 은혜의 방식으로 구원이 일어난다는 것이 밝히 드러났습니다. 그게 갈멜산의 표적이었지요? 그리고는 이스라엘의 왕이 전투의 현장에서 왕궁으로 귀환을 합니다. 물론 모형입니다. 여기에서 아합 왕은 그 자신의 도덕적 평가를 떠나서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상징적인 의미로만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그 왕이 승리의 행진을 하는데 어떤 이가 그 왕 앞에서 전령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전령은 왕의 승리의 소식과 그 내용을 미리 전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아합 왕의 귀환에 여호와의 선지자가 전령의 역할로 뛰어가고 있는 그림을 이렇게 그려 넣고 있는 것은 지금 아합 왕이 메시아의 모형으로 기능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호와의 열심에 의해 승리가 결정이 나자 성령의 비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비는 하늘 백성들의 육적 자아를 죽이는 비라고 했지요? 그래서 성령의 비는 성도에게 있어서 은혜의 단비이면서 동시에 옛 자아를 죽이는 수술용 메스이기도 한 것이라 했습니다. 진리는 그렇게 좌우에 날선 검처럼 성도의 삶에 들이 닥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드러난 것이고 그에 앞서 세례 요한이 엘리야처럼 예수 앞으로 먼저 달려가 참수를 당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비를 맞고 달리는 것이고 뒤에 오는 이스라엘의 왕도 비를 맞고 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바로 승리의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320절에서 성도가 물에서구원을 얻었다고 하지 않고 물로 말미암아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기록을 한 것이라 했지요? 삼손의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삼손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사사기 135절로 다시 가보겠습니다.

 

(13:5)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삼손의 이야기가 전체 구속사를 다 설명하는 것이라면 삼손은 엘리야나 세례 요한처럼 구원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건 제 추론이 아닙니다. 여기와 똑같은 말이 마가복음에도 나옵니다.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의 구원이 시작이 되는데 누구의 이야기부터 시작이 되나요? 바로 밑의 2절을 보세요.

 

(1:2~5)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복음의 시작, 즉 구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선포를 하고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막 바로 펼쳐지지 않고 세례 요한의 이야기로 그 시작이 설명이 됩니다. 그 세례 요한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보다 먼저 보내어져서 예수의 길을 가지요? 예수를 앞서 예수를 살아야 하는 세례 요한이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헤롯왕에게 참수를 당해 죽습니다. 저주의 비를 먼저 맞고 육의 죽음으로 예수를 준비하는 모습입니다. 그 뒤를 성령의 비에 젖은 예수가 좇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조금 전에 읽었던 열왕기상 18장의 엘리야의 기도가 여기에 그대로 나오고 있지요?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는 자가 엘리야입니다. 그런데 그 엘리야가 예수의 삶을 먼저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근거로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리게 하는 자가 엘리야인 것이고 그 자신이 예수의 죽음을 역사 속에서 먼저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삼손의 이야기에서 원시적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인 삼손을 죽이기 위해 힘의 상징인 블레셋의 성문에 매복해 있는 마귀의 세간들을 하나님의 아들이 창녀 같은 그들과 연합이 되심으로 그들의 마귀 성을 부수시고 승리의 행진을 하며 대적의 문을 약속의 땅으로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왜 삼손 이야기의 총정리 부분에서 삼손이 갑자기 블레렛의 성문을 뜯어서 메고 헤브론으로 가는 장면이 나오는지 이해가 가세요?

 

그렇게 죽어 마땅한 자들의 엘리야로 애굽에 먼저 보내졌던 사람이 있었지요? 요셉입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했던 자들을 형제로 부르셔서 하늘의 왕자들로 만들어 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했던 사람입니다. 물론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시는 예수는 모세로 또 한 번 그려지지만요. 그러니까 요셉은 모세를 준비하기 위해 미리 보내진 엘리야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셉은 애굽으로 먼저 들어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제들을 살려내는 자로 삽니다.

 

(45:7-8)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애굽은 하나님의 백성이 살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왜 애굽에서 살면 안 되는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기 위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애굽을 경험케 하셨던 것입니다.

 

(15:13~14)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그렇지요? 애굽은 이스라엘이 탈출해야 하는 이방 나라였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 나라에 있으면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곳이 탈출을 해야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나와야 할 애굽에서 바로의 아비로 그 땅의 치리자로 삼으셨다는 것은 그를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들어 버리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요셉이 바로 그러한 자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혹자들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신앙인의 삶을 견지한 사람에게 내려진 복이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정말 그럴까요? 불타버릴 땅, 좀비들의 땅에서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 정말 복을 받은 일입니까? 그건 하나님 아들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인 중의 괴수의 모습으로 애굽에서, 바벨론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덕분에 굶어 죽어 마땅한 우리, 그 분의 형제들이 살아나게 되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을 모형으로 보여주기 위해 요셉이 먼저 애굽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해골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총리가 된 것이 자자손손 자랑할 만한 것이라면 왜 요셉의 해골이 그곳을 나와야 합니까?  

그렇게 요셉이 메시아를 앞선 엘리야의 역할을 한 사람이라면 그 뒤를 이어 직접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는 주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모세입니다. 요셉은 모세를 준비하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러한 모세의 활약으로 죽어야 할 노예, 이스라엘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자기보다 앞서 애굽에 들어가 죽어야 할 가족들을 살려낸 요셉의 해골을 가지고 가나안으로 들어가지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성경이 모세를 예수 그리스도에 비유합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말은 모세 안에서 옛 사람이 죽고, 모세 안에서 새사람으로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건 휘장이요, 옛 언약, 즉 율법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길을 낸 것입니다. 어떻게요? 구름과 바다에서 모세가 세례를 받아 쪼개져 버린 것입니다. 바다가 갈라진 것이 제물이 쪼개지는 것과 같은 사건이라고 했지요? 거기에 쓰인 단어도 같고요. 그리고 그것은 할례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따라서 모세는 자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는 예수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 자신이 홍해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요셉, 모세, 모두 다 애굽에서 한 가닥 하던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요셉은 애굽에서 죽이시고, 모세는 애굽에서 쫓겨나게 하십니다. 둘 다 애굽에 대해 죽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죽음을 담보로 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엄청난 능력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을 낫게 하시고, 수많은 자들을 먹이시고 하시다가 결국 그 힘을 다 털리는 모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이 세상에서 진짜 힘은 죽은 자를 살리고, 병을 낫게 하고, 배고픈 자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매고 죽어서 진짜 사망에 빠진 자를 살리는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애굽에 대해 죽은 자들에 의해 없음이 있음으로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먼저 애굽에 대해 죽어서 그 애굽을 빠져 나가고 그 뒤를 이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애굽에서의 탈출을 성공적으로 성취해 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삼손은 어때요? 삼손이 가사에서 죽지요? 가사는 블레셋, 즉 바벨론의 수도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삼손이 블레셋의 성전을 무너뜨리고 그 성전과 함께 죽습니다. 그리고는 그 시체가 그 블레셋의 땅에서 가나안으로 옮겨집니다. 그리고는 죽어야 할 창녀, 이스라엘이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16:30~31)

30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31 그의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 시체를 취하여 가지고 올라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 아비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 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년을 지내었더라

 

삼손이 가사에서 블레셋과 함께 죽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체가 가나안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 삼손의 장지가 마노아의 장지랍니다. 굳이 성경이 삼손의 장지를 마노아의 장지라고 밝히는 것은 삼손의 죽음이 바로 블레셋의 통치 아래에서 태평을 구했던 이스라엘의 대표인 마노아의 죽음과 연합이 된 죽음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삼손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선명하지요?

 

삼손과 들릴라의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없는 은혜와 지칠 줄 모르는 하나님 백성들의 하나님 배반의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그 창녀 같은 당신백성들을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 들릴라의 이야기는 15장에서 삼손을 배신하여 블레셋에게 넘겨주었던 이스라엘의 이야기의 재 반복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여기에 나오는 들릴라는 소렉 골짜기의 여자입니다. 소렉은 삼손의 고향인 소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유다의 점령지입니다. 그리고 그 들릴라라는 이름은 음탕한, 연약한이라는 뜻의 셈(sam)어입니다. 뿐만 아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죽일 수 있는 비결을 알아내기 위해 들릴라에게 가져온 돈이 은 1,100 세겔이나 됩니다. 그건 노동자가 10년 동안 벌어서 하나도 안 쓰고 모아야 만질 수 있는 큰돈 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삼손의 이야기 전체가 하나님을 배신한 하나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는 것임을 감안할 때 들릴라는 유대 여자가 맞는 것 같습니다. 만일 들릴라가 블레셋 여자였다면 블레셋이 그렇게 큰돈으로 들릴라를 매수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자를 수없이 배신하는 여자를 위해 남자가 죽음으로 그 여자가 살아나는 십자가의 이야기가 여기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는 이라는 것에 매수가 되어서 자신을 죽도록 사랑하는 남자를 의도적으로 죽이려 합니다. 그게 우리의 모습 아닌가요? 그런데 그러한 음탕한 여자의 요구에 남자가 순순히 죽음의 길로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여자가 뭐 그렇게 사랑스럽다고 나실인의 비밀을 드러내고 죽어 버리는 것일까요? 너무 바보 같지 않으세요? 실제로 들릴라는 삼손을 칡으로 묶기도 하고, 쓰지 않은 밧줄로 묶기도 했으며, 머리카락을 위선, 즉 베틀 날실에 섞어서 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삼손을 죽이려고 하는 블레셋 사람들을 불러 들였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걸 뻔히 다 겪으면서도 들릴라를 사랑해 줍니다. 그게 바로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인 것입니다. 삼손이 여자한테 환장을 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주석가들이 그러한 삼손의 여성편력을 책잡아 그러면 안 된다는 식의 교훈 거리로만 삼아 버립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들릴라는 지금 블레셋의 사주를 받은 여인입니다. 그 말은 바꾸어 말하면 블레셋처럼 세상의 힘만을 자신들의 가치의 척도로 삼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형이 들릴라인 것입니다. 그 들릴라가 블레셋과 함께 삼손을 죽이려고 하는데 삼손이 번번이 엄청난 힘으로 그 죽음을 모면합니다. 그런데 언제 삼손이 블레셋에게 붙들리지요? 자신의 머리카락에 힘이 들어 있다는 것을 들릴라에게 알려주자마자 블레셋에게 붙들립니다. 인간의 육신 중에서 가장 약한 것이 머리카락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강함이 들어 있다는 역설, 이게 힘의 원리 속에서 사는 세상에게 이해가 갈까요? ‘약함 속에 강함이 들어있다라는 묵시의 역설이 세상에게 공개가 되자 세상이 옳다꾸나하고 예수를 붙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폭풍을 잠잠케 하시고, 물위를 걸으실 때, 감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생각을 할 수 있었나요? 오히려 왕이 되어 달라고 예수님을 추켜세웠습니다. 힘의 원리로 움직여지는 세상 속에서 힘을 가진 자는 당연히 왕의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힘을 부정하십니다. 행복은, 구원은 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라는 올바른 자 인식, 회개에서 온다고 하시면서 유대인들이 힘으로 차곡차곡 쌓고 있던 도덕과 윤리와 율법지킴과 재물을 일거에 다 부정해 버리십니다. 그리고는 자신도 수난을 받다가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자, 약함 속에 진짜 강함이 있는 것이라는 생경한 말씀을 하시자, 세상이 예수를 결박해 버렸습니다. 삼손의 이야기 속에 바로 그러한 예수와 세상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약함 속에 강함을 감추고 오신 분입니다. 아니 그건 엄밀히 말해 감추신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이 땅에서 기적을 행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건 마치 삼손의 머리카락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 행함은 예수님에게 사유된 힘이 아니라 예수님을 장악한 성령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일을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삼손의 힘은 삼손에게 사유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삼손의 머리카락에 힘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실인의 서원이라는 것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약속에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 그것이 바로 삼손의 힘의 실체였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나실인의 서원은, 창세 전 언약 안에서 하나님 절대 의존자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께서 쓰시는 대로 사용당하면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당신 백성들을 새롭게 창조해 내시겠다고 하는,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힘을 발휘하게 하는 것입니다. 삼손이 바로 그러한 예수를 모형하고 있던, 예수 앞선 엘리야였던 것입니다. 삼손의 힘은 머리카락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16:20)

20 들릴라가 가로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 하였더라

 

보세요. 성경이 삼손의 머리카락이 없어져서 힘이 빠진 것이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께서 삼손을 떠나셨기 때문에 그에게서 힘이 사라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머리카락이 자랐을 때에도 삼손은 힘을 사유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힘을 얻습니다.

 

(16:28)

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 하옵나니 나를 생각 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 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그렇지요? 이렇게 삼손은 하나님께 택해진 나실인으로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지(약속 안에서) 그 자신이 힘을 사유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 나실인의 서원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봄으로 해서 삼손의 머리카락이 의미하는 바를 상고해보고 오늘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6:2~8)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 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그 부모 형제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인하여 몸을 더럽히지 말 것이니 이는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 머리에 있음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니라

 

다른 것은 다 차치하고 나실인의 머리카락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보자고요. 이 민수기 6장에 나실인이라는 단어 나제르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몰라요. 그 단어가 구별, 거룩, 나실인 등으로 번역이 되어서 개역 성경에서는 그렇게 티가 나지 않지만 히브리 원어 성경에는 나제르라는 단어가 수도 없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나제르라는 단어는 제사장들이 쓰는 관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29:6)

그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위에 성패를 더하고

 

(8:9)

그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관 위 전면에 금패를 붙이니 곧 거룩한 관이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더라

 

여기에서 제사장의 관이 바로 나제르입니다. 그러니까 나실인들이 머리를 깎으면 안되는 이유는 제사장들이 머리에 관을 쓰는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의 관 나제르에는 ‘Holy to YHWH’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건 여호와께 거룩하게 구별되어 바쳐진 자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렇게 여호와께 바쳐진 자에게는 여호와의 영광이 깃들겠지요? 그게 바로 나실인의 머리카락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여자들에게 머리를 기르라고 한 것이고, 머리에 무엇을 쓰라고 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교회인 여자의 존재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져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사는 자. 그게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나실인의 삶을 살다가 가신 것이고, 교회가 바로 그 나실인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나실인의 머리카락은 나는 하나님의 신이 떠나시면 죽은 흙에 불과한 자입니다라는 자기부인의 상징인 것입니다. 머리카락이 의미하는 것이 하나님께 바쳐짐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께 바쳐진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 측에서의 권능이 머리카락이니까요. 그래서 나실인의 서약이 끝나면 그 머리카락을 잘라서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린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나제르가 시편에서는 면류관으로도 쓰인다는 것을 아세요?

 

(132:18)

18  내가 저의 원수에게는 수치로 입히고 저에게는 면류관이 빛나게 하리라 하셨도다

 

여기에서 면류관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나제르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면류관은 하나님께 바쳐진 자의 하나님 종속의 현실이 바로 면류관인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완전한 하나님의 능력이 비워진 그릇인 성도 안에 채워지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천국에 가면 성도들이 면류관을 벗어서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것이니까요.

 

그렇게 나제르, 나실인은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존재하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존재양식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제르라는 단어와 어원이 같은 네제르라는 단어가 이사야서에 쓰이는데 거기에서는 네제르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11:1-2)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여기에 보면 이새의 줄기, 즉 목동에 불과했던 다윗의 아버지에게서 네제르’, 연한 순이 나와서 메시아가 될 것인데, 그 싹 위에 무엇이 강림한다고 해요? 여호와의 신. 이게 바로 나실인인 삼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나실인, 나제르, 네제르, 나사렛 등의 단어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3절에서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렇게 삼손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영광인 머리카락에 의해 존재하는 나실인입니다. 

그런데 그 머리가 밀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의 연약함, 자기 부인과 자기 부정이 하나님의 능력을 수여 받는 것이라는 십자가의 원리를 부정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스스로 감추어 버리는 것이 머리를 미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장 약한 것을 감추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때 피조물은 죽는 것입니다. 그게 사망의 상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감추는 것. 하나님은 그러한 자와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삭발의 현실까지 경험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울부짖으시지요? 그건 머리를 밀린 삼손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힘없이 죽게 하시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몰라서 물으신 걸까요? 아니요. 그 길을 똑같이 가야하는 우리를 위해 대신 물어 주신 것입니다.

 

(4:15)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주님은 그렇게 우리의 죄와 저주가 되셔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셨던 것입니다. 삼손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그러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들릴라를 위해 죽음을 자처한 삼손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그 삼손이 묵시의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눈알이 뽑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살과 피가 아니면 그 어떤 방법으로도 살아날 수 없는 하늘의 백성들을 위해 맷돌을 돌리는 것입니다. 맷돌은 곡식을 가는 기구입니다. 삼손은 자신의 몸을 갈아 당신의 백성들에게 먹이신 예수의 맷돌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16:21)

21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로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그렇게 자신이 죽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기부인의 삶이 하나님 나라 존재들의 삶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승리임을 보여주는, 삼손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이 이 삼손 이야기 전체를 아주 잘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16:30)

30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블레셋, 즉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육적 자아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승리라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 안의 바벨론 성전이 와르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블레셋과 함께 저의 자아가 죽게 해주세요.’ ? 내가 바로 죄인 중의 괴수니까요. 그렇게 옛 자아가 죽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 몸을 입기를 소망하는 자들을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몇 번이고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댄 들릴라를 살리기 위해 눈알이 뽑히고 맷돌을 갈다가 결국 들릴라를 품에 안고 블레셋과 함께 죽어야 할 들릴라, 창녀 이스라엘을 살려내는 예수님의 이야기, 이해가 가시지요? 삼손의 이야기,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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