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칼럼 /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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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깨비에 속지마라 진리만 진짜다

김 성수 2012.08.31. 

 

진리,

 

나는 지금 진리를 전하고 있는 자다.

그런데 가끔 내 입에서 나오는 ‘진리’라는 소리가 생경하게 들릴 때가 있다.

어느 때엔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게 내 아이의 이름이 맞나?’하고

고개를 갸우뚱 거린 일이 있었다너무나 익숙하게 아무 세포나 누르면

자연스럽게 나오던 그런 말들이 한 순간 아주 낯설게 느껴질 때,

내가 익숙한 그것이 정말 그것이 맞는가 생각하게 한다.

 

진리수없이 외친 값지고 고귀한 말.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단어가 너무 낯설다.

그리고 그걸 전하는 일을 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도 익숙하지 않다.

 

난 그걸 마음으로 가졌다그런데 난 소리로 그걸 꺼내내어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곤혹스럽다.

불타는 사명감에 목숨까지 걸어가며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이들이 들으면

그들의 기도 제목에 내 이름이 올라갈 일이다.

 

진리가 되어 진리를 전하는 자의 삶은 생기가 넘치고 만족이 넘치며 기쁨이 넘친다고 한다.

그런데 나에게 있어서의 그 행위는 삶을 버티는 행위에 불과하다.

죽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맹목으로 치닫는 나의 삶에 브레이크를 걸어보는 행위 정도라 할까?육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는 육적 존재가 아무것도 아님의 자리로 내려가는 그 비탈길에서

감속의 페달을 밟는 행위로 난 설교를 한다.

 

흐르는 시간은 인간을 부패케 하고 결국 죽음에 당도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흐르는 시간의 바깥에 거할 수 있는 비결을 알게 된 자가 진리다.

‘나’를 흐르는 시간의 바깥에 두면 그 ‘나’는 죽음과 부패의 공포에서 당연히 벗어나게 된다.

그런데 그 ‘나’가 도저히 시간 바깥으로 튕겨져 나갈 수 없는 이 육신과 이성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고통이다.

인식론의 전환그건 내 능력 밖이다.

내 육은 그 본능대로 마음대로 인식한다.

 

그래서 가끔 사진을 본다.

그 사진 속의 나와 그니들은 시간 밖에 존재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웃고 있다나는 그 속에서 죽음을 망각한 찰나를 소유한 군자를 본다.

 

나의 모든 희망과 신념은 궁극적으로 의식의 전체주의와 악수한다.

진리를 마음으로 가졌다는 나는 여전히 모든 광휘를 의심한다.

그리고 그 의심하는 개인성을 사랑한다.

그런데 그 속에 살아있는 진리의 나그것이 나의 유일한 안식처다.

 

방충망에 붙은 매미는 그의 환경에 의해 날파리로 전락한다 했던가?

매미는 숲속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는 법.

난 진리를 사모하는 이들 사이에서만 살아 있다.

거기서 벗어난 나는 이렇게 힘이 없다.

 

자칭 진리를 안다는 후배 아이를 만났다.

여전한 독설과 감지 않은 긴 머리,

히브리어 사전과 아람어 낡은 서적을 들이밀며

뭔가를 이야기 하고 있는데듣고 있기가 힘겹다.

 

혹 다른 이에게 비치는 내 모습이 저렇지는 않을까?

과장된 몸짓과 과장된 언어그나마 혀가 어눌해 얄밉지는 않다.

그런데 힘들다.

 

난 알았다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가치일 수 없다.

그 속에 들어 있는 진리만 진짜다.

난 그렇게 삭제되어야 함을 알면서도 왜 삭제되지 않은 육으로 힘겨워 하고 있는가?

그래그 녀석의 그 미운 모습도 내 인식에서 삭제해야겠지.

 

큰 아이가 전화를 했다.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기숙사에 들어가 밥을 해 먹고 열두시가 다 된 시간에

한 방 친구들 방해 될까봐 교정을 걸으며 전화를 한단다.

아이의 목소리에 그리움이 많이 배어 있다.

무뚝뚝한 대학생 소년이 ‘아버님 사랑해요’를 몇 번이나 반복한다.

방학하면 바로 나올 거라는 아이의 말에 눈물이 났다.

아이의 외로움이 나에게 전이가 된 걸까?

아니다난 나의 외로움을 그 아이의 외로움에서 읽었을 뿐이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이것들

나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 서적들과 사람들신앙의 선배들이란 작자들.

모든 것이 덧없다.

진리는 진리대로 혼자 흘러 다닌다.

내가 애쓸 일이 아닌 것.

 

그래조금 쉽게 가자.

무례한 그니들에게도 상처받지 말고...

천천히 쉬엄쉬엄 가자.

놀멘 놀멘 하라우하셨다던 그 선배의 아버님 말이 오늘따라 정답다.

 

그냥 외로워하는 내 아이가 보고 싶다.

이게 지금의 내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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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먼 진리의 여정

 

 

지난 며칠간, 설교 준비라는 중압감에서 해방이 되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짚어 상고해 보는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삶의 길목마다에 세워져 있는 에벤에셀의 돌탑들이 
내겐 너무나 은혜로운 전환점들이었음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신앙생활은 열심 그 자체였다. 열심이 특심이라는 말은 꼭 내게 어울리는 그런 말이었다. 
난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줄 알았다. 몸이 부서져라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종교 행위를 하다보면 하늘도 감동하여 천국에 보내줄 수밖에 없는 것이 

신앙생활의 내용이겠거니 살았던 것이다.
 

 그런 나에게 한국 개혁주의 진영의 독보적 목사님들 몇 분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난 한국교회 전반에 퍼져있는 신비주의와 기복주의의 허상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신비적인 경험을 허다하게 해왔던 내게 그러한 신학의 스승들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용한 목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개혁신학의 틀 위에서 나의 신학이 정립이 되어갈 즈음 난 미국으로 신학을 공부하러 떠나게 되었다. 
친정이 미국인 아내를 만나 그것도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난 그곳에서 침례교 신학과 감리교 신학과 장로교 신학을 
각 2년씩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나에게 좋은 스승들을 또 붙여 주셨다. 
난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스승들을 만나면 귀찮을 정도로 그들을 달달 볶아대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이 용납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밤이고 낮이고 난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그 무엇도 개의치 않는 거머리 같은 사람으로 살았다. 
처음에는 그러한 학문적 욕구 충족의 차원에서 선생들을 못살게 굴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난 기독교의 실체를 하나하나 정립해 나가고 있었다.

그 무렵 내 좌우명이 ‘스승을 만나면 반드시 그 스승을 뛰어 넘자’였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난 길게는 2-3년 짧게는 수개월 만에 그 스승들이 갖고 있는 학문의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었다. 
난 하루에 서너 시간 잠자는 시간 외엔 책상 앞에서 떠난 적이 거의 없다.

그러니 목회에도 신경을 쓸 수가 없었을 터.

난 목회라는 거창한 제목을 붙여 놓고 문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관리하는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솔직히 말해 ‘나의 구원’이었다. 이렇게 죽도록 공부를 해서 정립하고 가르치고 
믿었던 것이 ‘아니요’에 해당하는 것이면 어떡하나 싶었다. 그래서 정말 죽도록 공부를 했다. 
남들이 뭐라 하든 말든 내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진짜 어떤 분이신가?’였다.

그 선생들로부터 소개받은 개혁주의 신학의 교과서라해도 과언이 아닌 로이드 존스나 아더핑크, 존 오웬, 바빙크, 
워필드, 아브라함 카이퍼, 게할더스 보스, 클라인 등의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그들이 갖고 있는 신학적 지식의 
교집합들을 정리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중세 종교 개혁 이전의 엉터리 율법주의로 회귀를 한듯한 
왜곡된 개혁주의 신학에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신학자들 각자가 

서로 어긋난 소리를 하는 것은 그런대로 이해할만 했다. 
그런데 신학자 자신의 일관성 없음이나 한 책 안에서의 삐걱대는 논리는 그야말로 억지다 싶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하고 서성이고 있을 때 난 원어 성경에 눈을 돌렸다. 
그런데 미국에는 원어 성경에 관심이 있는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많이 없었다. 
아니, 전문적인 언어학자들이나 문자 고고학자들은 아예 날 상대도 해주지 않았기에 주변에 있던 목회자들을 
돌아보았을 때의 내 판단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신학교 때부터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재미있게 공부했던 
나는 혼자서 사전을 가지고 씨름을 했었다. 그래서 미국에 있을 때부터 설교에 원어를 너무 많이 섞어서 쓰는 
설교자라는 평을 얻기도 했다. 그런데 부족했다. 신학교 몇 년 동안에 배운 일천한 원어 실력으로는 
성경의 진의 파악이 많이 힘들었다.
 
그렇게 밀려서 한국에 입성을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번에도 나에게 좋은 스승들을 붙여 주셨다. 
하나님은 라틴어와 아람어, 그리고 수메르어를 수십 년 간 연구를 해오셨다는 교수님들을 만나게 해 주셨다. 
어떤 분은 40년 가까이 아람어만을 연구해 오신 분도 계셨다. 그런데 그 분들 모두가 나를 참 귀하게 대해주셨다. 
그런 거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 목회자가 별로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원어 성서를 열심히 연구하는 선배 목사님과 후배 아이도 만나게 되었다. 
난 예의 그 오기가 발동해서 몇 개월 안에 그들의 울타리를 넘으리라 결심을 하고 밤잠을 설치며 
원어 연구에 매달렸다. 그러면서 그 분들로부터 참 많은 도움을 받았다.

교수님들이 추천해 주신 프랑스와 영국의 문자 고고학자들의 책들을 하나하나 탐독해 들어가면서 
난 수메르 문명으로부터 흐르는 문자의 흐름을 정리할 수 있었다.


다고네의 글자와 도상, 넬슨 굿맨의 예술의 언어, 폴 리괴르의 상징이론에의 접근, 모리스 블랑쇼 끝없는 대담, 
벤베니스트 알파벳은 시나이 반도에서 탄생했다, 등등 많은 책을 샅샅이 읽었다.

그러고 나니 우가리트어로부터 시작하여 애굽의 상형문자, 그리고 가나안의 패니키아 문자와 원 시나이어, 
그리고 아람어와 고 히브리어, 그리고 거기서 흐르는 헬라어와 라틴어, 그리고 지금의 알파벳에 이르기까지 
그 흐름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난 이제 성경을 문자로 곡해케하는 마소라 문법에서도 조금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이 알파벳(알렙+베잍, 알파+베타, 하나님의 성전)이 원 시나이어(BC1,500년경 모세 때)에서 발출되고 
생성되었다는 것도 언어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확인하게 되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그림문자에 가까운 원시나이어와 그것과 섞여서 하나님의 역사 속 택한 백성들에게 
사용되었던 아람어와 히브리 고어들의 연관성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열심을 다시 한 번 
절절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원 시나이어의 그 그림문자로 내 이름 석 자 뿐 아니라 
간단한 의사소통의 언어도 표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열심히 연구를 하고 당시의 고문서들을 열심히 읽어 보아도 그 문자들의 
원의 추적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파자라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고 생경하여 그 작업에 푹 젖어있었다. 
그런데 고문서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문자의 내용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 자음 알파벳 일곱 번째 글자인 ‘자인’은 ‘무기, 대립, 갈등’등의 의미를 담은 
문자로 히브리어 성경 해석자들은 이해를 하고 있다. 그런데 고문서를 찾아 읽어 보니 

그 문자는 혁명, 파괴, 활성화, 
가운데, 재검토, 장식 등의 의미로도 쓰인다. 나를 가르쳤던 아람어 선생은 무기, 대립, 갈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 문자를 억지로 끼워 맞추어 주고는 ‘이게 정답이다’라며 일보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성경에서 찾아 읽어본 그 문자는 그런 의미 이외에도 너무나 많은 의미를 함의하고 있었다.

 

만일 그러한 기초적 의미 몇 개에 묶여서 성경의 그 무궁무진한 

내용을 그 안에서만 정형화시켜 읽어내야 한다면 
우리가 게마트리아(Gematria)나, 노타리콘(Notarikon)의 

카발라들과 뭐가 다른 게 있겠는가? 그들은 중세 시대에 
나타난 유대 신비주의자들이다. 그들도 지금 원어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는 이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가슴에 품고 있는 히브리 자음 값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으로 토라를 해석했다. 
그렇다면 지금 그러한 히브리 자음 값만을 가지고 파자라는 형식을 통해 성경을 그 틀 안에서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는 이들이 ‘타로 점’을 만들어 낸 유대 신비주의자, 카발라들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난 내게 문자를 가르쳐 주는 스승들에게 그 의미 값을 배우면서 

반드시 성경의 모세 오경이나 선지 서들이나 
시가서의 어절들을 갖다 대 준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어떻게 문자로 이해를 하는 지를 자주 시험해 본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에게 문자에 대한 지식은 있는데 정리된 신학이 없다. 그래서 문자 공부를 열심히 하는 
후배 아이는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이나 예정이나 선택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리고는 김성수 목사와 자기는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아니다. 절대 아니다. 문자를 공부하고 율법주의를 배격한다고 해서 절대 목적지가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난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아람어를 40년간 연구했다는 교수님은 불교와 기독교를 하나로 묶어서 이해를 하고 있었다. 
내 안에 이미 하나님이 있었는데 내가 그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란다. 
  
그래서 난 그들에게 건전한 신학적 바탕에 세워지지 않는 문자의 집이 신비주의나 기복주의 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 일갈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비주의에 대하여 “경험을 통하여 
신을 인식함(cognitio deo experimentalis)”이라고 간단히 정의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문자 고고학에 빠진 그들은 그들보다 더 유치하고 얕다. 
그러면서 자유, 자유 하는데 정말 밥맛없다. 무슨 놈의 자유가 그런 자유가 다 있나?

 

술에 취해 스승을 욕하면서도 ‘난 진리를 아니까 뭐든지 해도 돼’라고 하면 
용서가 되는 건가? 좋은 동지들을 만났는가 싶었는데 또 난 그들과 다른 길로 홀로 접어들었다. 
그러한 지적 허영심과 지적 호기심 충족을 ‘은혜 받음’과 혼동하고 있는 우리 서머나 식구들이 혹 있을까봐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 진리 탐구에의 길은 참 길고도 험한 여정이다. 
그래도 난 다음 계단으로 올라가 더 열심히 파고 들어갈 것이다. 
진리의 맥 안에서는 모든 게 하나인 것을 확실하게 알았으므로..




photo.jpg

맨 왼쪽에 있는 모자 쓴 청년이 영민이입니다. 사진이 좀 이상하게 나왔네요^^ 왼쪽부터 영민(첫째-여호수아)이 하늘(둘째-다니엘)이 바다(셋째-폴) 입니다.




I miss him.

아버님, 그리워요.
Too much.

굉장히 많이 그리워요.
Almost to the point where it's unbearable.

이제는 거의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왔네요.
I can't even look at a picture of him without bursting into tears.

아버님의 사진을 볼 때면 항상 울음을 참을 수 없어요.
It hurts too much to think about him or the memories we shared.

아버님을 생각하거나 아버님과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리는  일이 너무 아프네요.
But on this day of all days I can't help but think of him.

하지만 단 하루도 아버님을 생각지 않는 날이 없어요.
He was so great.

아버님은 정말 위대하신 분이셨어요.
We had so many great times watching movies, going on vacations, eating nice food, lifting weights at the gym, and he even beat my ass as a kid to make sure I got things straight in my life. 아버님과 함께 영화를 보고, 여행을 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던 너무나 소중한 기억들, 심지어 어렸을 때 똑바로 살라고 저를 엉덩이를 때리며 혼내신 기억마저도…
And I love him for that.

그래서 저는 아버님을 더 사랑해요.
My father struggled too much in his life.

아버님은 살면서 너무나 많은 고통을 겪으셨어요.
From being spat on in the face, being betrayed by people who he thought were his friends, receiving death threats, and even being deliberately poisoned once.

아버님의 얼굴에 침을 맞고, 친구라고 여겼던 사람들에게 배신 당하고, 살해의 위협에 시달리고, 심지어 고의적으로 아버님을 독살하려고 했던 적도 있었지요.
But he had my family.

그러나 아버님에게는 우리 가족이 있었어요.
He would always tell me that we were the only thing that would keep him going in his harsh life.

아버님은 이런 힘든 삶을 겪어 낼 수 있는 이유가 우리 가족이 함께 했기 때문 이라고 항상 말씀하셨어요.

Thinking about how much he loved me hurts me more.

아버님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생각하는 그 자체가 너무나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He would always tell me he was proud of me.

아버님은 항상 제가 자랑스럽다고 말씀하셨지요.
"I'm proud of you my son".

장하다 , 내 아들아.”
I can still remember his voice and the way he said it to me all the time.

저는 여전히 아버님의 목소리, 그리고 아버님이 제게 말씀하시는 말투도 늘 기억해요.
Every time I got an A on a test, beat a personal record in the gym, lectured my younger brothers, ate a large-ass meal, and anything I did to help me progress into adulthood.

제가 시험에서 A를 받을 때, 체육관에서 누군가의 기록을 깼을 때, 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거나 , 밥을 배터지게 먹었을 때도…그리고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도움이 되는 일은 무엇이든지…

Now that I'm 18 and officially a young adult it pains me to know that my father won't be here to tell me he's proud of me.

이제 저도 18세의 젊은이가 되었는데 이제 그런 저를 자랑스럽다고 말씀해주실 아빠가 이곳에 계시지 않다는 사실이 저를 아프게 합니다.
I won't be able to see him at my college graduation, to tell him about my first job, to drink with him, to sing with him, to see him at my wedding, to have him see his grandkids...

아버님의 모습을 대학 졸업 날에도 뵐 수 없고, 제 첫 직장에 대해서 얘기를 나눌 수 없고, 아버님과 함께 한 잔 하면서 노래할 수도 없고, 제 결혼식에도 함께 할 수 없고, 그리고 아버님의 손자 손녀를 보여드릴 수도 없겠지요.
It hurts too fucking much.

아버님이 안 계시다는 상황이 정말 지긋지긋한 고통이네요.
I believe that he is in a better place, but I know for a damn fact that he would want to be here with us to see and help my family progress.

아버님은 지금 더 좋은 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아버님께서는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길 원하고, 우리 가족이 성장하도록 돕기를 바래신다는 그 마음도 알아요.
Knowing he will be able to rest in peace does make me happy.

아버님이 주님의 평강 속에 잠드셨다는 사실이 정말로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You could call me selfish all you want to, but it tears me up inside to know I won't be able to see him until I die.

아버님이 저를 이기적이라고 말씀하실지라도, 제가 천국에 갈 때까지는 다시는 아버님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뼛속까지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I want him here. 아버님이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계셨으면 좋겠어요.
Even if he is in a better place.

비록 여기보다 더 좋은 천국에 계실지라도…
I've gained wisdom and experience after he left, but I would gladly trade all that back and more to have him here.

아버님이 떠나신 후 저는 지혜와 경험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을 이곳으로 다시 모시고 올 수만 있다면 저는 그런 모든 것들을 다 버릴 수 있습니다.
So many people failed to see how valuable he was and instead wished him gone.
He was one of the things I cherished most in this world.

아버님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가 돌아가시기를 저주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And now that I've lost him my heart is permanently scarred

아버님을 잃고 나니 제 가슴은 영원한 상처에 고통 받습니다.

Atach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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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오래 전 주문한 책이 도착했다. 오래 기다리던 책이라 너무 반가워 포장을 뜯어보니 함께 주문했던 John fogerty 의 컨츄리 음반이 함께 들어 있다. 멀리 유럽에서 긴 시간 여행해서 온 나의 favorite album.

기다렸던 Gerard Pommier 의 책을 집어 들고 단번에 3분의 1쯤을 읽어 내려갔다. 호흡이 가쁠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이 문자들과 언어들의 진의가 프랑스 언어학자가 집대성해 놓은 언어 역사 속에서 착착 맞아 들어간다. 그들은 언어를 연구해 놓았는데 나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흐름을 읽는다. 신기하고 신묘막측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살아계신 것이다.


가쁜 호흡을 가다듬고 John fogerty의 음반을 걸었다. 전설적인 컨츄리 록 그룹 CCR의 리더인 그가 팀 탈퇴후 컨츄리 음반을 내 놓았었는데 어디서도 그 음반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프랑스의 헌 책방에서 그 음반을 찾은 것이다. 그것도 신기할 따름이다.



역시 John fogerty, 커피 한 잔을 내려놓고 한참을 그의 음악에 빠져 들었다.


그러다 보니 오늘 약속이 생각났다. KBS 신우회에 설교를 하러 가기로 한 날.


KBS 방속국으로 떠나야 한다. 집사님 한 분이 운전을 해 주시기 위해 집으로 오고 계시단다. 난 옷을 입고 기다리고 있는 중.

25년전쯤 난 군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한 대학 3학년생이었다. 그때 심심풀이로 나가 대상까지 타게 된 대학가요축제가 KBS주최로 열린 가요제였다. 그 일을 계기로 난 가스펠이라는 것을 노래하게 되었고 그 일로 난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그 KBS는 나에게 있어 참 의미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 내가 설교를 하러 간다. 그때도 난 John fogerty를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함께 어울리던 김광석이나 한동준이나 박학기 같은 친구들과 참 많은 뮤지션들의 이야기를 했었지만 나의 관심은 이글스나 John fogerty같은 건츄리 적 성향이 강한 음악가들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혹시 라디오 방송 출연이 있으면 늘 난 그들의 음악을 틀었고 그들의 음악을 기타 하나로 불러 제끼곤 했다. 함께 하던 PD들의 칭찬에 으쓱해 하며 방송국을 나오던 그 때가 생각난다. 그런데 그 곳으로 이제 복음을 전하러 간다. 재밌다.


아, 나와 동행을 해 주겠다는 집사님이 주차장에 오셨단다. 다녀와서 계속....



비까지 오는 올림픽 대로를 뚫고 KBS 신관에 도착했다. 우리를 반겨주신 분은 ‘달려라 하니, 개구쟁이 스머프’등의 만화 영화를 수입해다가 연출을 하셔서 방송을 하셨던 영화 부문 PD셨다. 신우회 부회장님이시다. 그 분을 따라 신우회 모임 장소로 향하는데 청소년 아이들이 학교에도 안가고 길게 줄을 서 있다. 부회장님 말씀에 오늘 뮤직 뱅크 녹화가 있단다. 팬클럽 아이들이 벌써부터 와서 진을 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장소는 뮤직뱅크라는 프로그램 녹화장 바로 옆이었다. 한쪽에서는 아이돌 그룹 아이들의 고막을 진동시키는 시끄러운 음악이 들려오는데 한쪽에서 피아노 반주에 찬송가가 들려온다. 그 불협화음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거두절미하고 한 시간 설교를 했다. 함께 동행 한 최집사님 말로는 설교를 시작한지 한 5분쯤 뒤에 모든 사람들의 머리가 앞으로 쏠리더라 했다. 설교를 하는 나도 알 수 있었다.



그 분들의 진지함과 열정이 내 가슴에 와 닿았다. 아나운서, PD, 방송 심의실 부장님, 연기자, 모두들 말씀에 갈급해 있음이 눈에 보였다. 설교가 끝나고 함께 방송국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면서도 질문은 계속되었고 강해 설교를 계속 듣고 싶으시다는 그 분들께 우리 교회 웹 사이트를 알려 드렸다. 식사를 한 후에도 우린 방송국 지하 커피숍에서 한참 동안 말씀을 나누었다. 라디오 피디들께서 매주 성경공부를 해 주십사 정중히 부탁을 하셨다. 그 중에는 나의 사사기 강해 책을 열심히 읽고 있다는 젊은 프로듀서도 있었다.



조금 신기했다. 이런 반응은 기대도 안 했는데 눈물까지 훔치며 말씀을 달게 받는 그런 하나님의 백성들이 도처에 있다는 것, 감사한 일이다. 기분 좋은 추석을 맞을 것 같다. 이번 주일은 우리가 예배당으로 쓰고 있는 기독교 방송 건물을 쓸 수 없어 부득이 하게 교회로 모일 수가 없다. 간만에 가족들과 추석 아침상에 둘러앉을 수 있을 것 같다. 난 거기서도 또 진리의 말씀을 이야기할 것이고 가족들은 추석 상에서 하늘의 양식을 함께 받아먹게 되겠지. 다른 거 없다. 이게 행복이다.

최 집사님 고생 많았어요. 땡큐


2012.08.04 12:40

그리움으로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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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01583.JPG


아이가 떠났다. 큰 아이가 떠났다.

늘 내 곁에 있어 줄 것 같았던 내 마음 속의 아가...

난 그 녀석의 어릴 적 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닌다.

지금도 훌륭한 아들이지만 어릴 적 그 아이는 나의 모든 것이었다.

삶의 고단함에 고자누룩해진 아빠를 위해 연신 뽀뽀를 해주고 노래를 불러주고,

아이 엄마와 말다툼이라도 할라치면 어느새 우리 둘 사이에 들어와 자는 척을 해 주던 아이...

그 모습이 너무 처연하고 서러워 그 상막한 상황을 잊게 해 주었던 아이...



한국에 계신 할아버지에게 다녀오면 며칠 밤을 그리움에 울 줄 알던 아이.

아빠의 콘서트에서 동생들과 멋지게 skit을 준비해서 아빠를 놀라게 해 주었던 아이.

기도원에서 몇날 며칠 울고만 있을 때 아빠를 찾아와 예수님 십자가를 익살스럽게 셋으로 만들어 보여주던 아이.



서정주는 자기 인생의 팔 할은 바람이 키웠다고 했는데 나의 인생의 팔 할은 내 아이들의 어릴 적 모습을 그리워하는 그 그리움이 담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 힘들 때마다 그 힘든 아빠 곁에서 늘 명랑하게 잘 커준 아이들을 생각하여 이겨냈었다.



그 아이가 없다. 갑자기 없다. 머나먼 미국 땅에 아이를 홀로 남겨두고 떠나는 아비의 심정, 왜 이별의 순간에는 잘해준 것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고 못해준 것만 기억이 날까...



막내 아이의 생일이라고 이태원의 옷 가게에 들렀다. 둘이서...

형이 없는 아이도 힘이 없고, 울음 가득 머금은 아비의 눈도 큰 아이가 즐겨 먹던 햄버거 집에서 떠날 줄 모른다.

진리는 관계를 타고 넘는다고 했던가?

너무 쉽게 진리를 논하지 말자. 너무 쉽게 위로도 하지 말자. 그리고 너무 쉽게 위로 받지도 말자. 그냥 슬픈 것은 슬픔으로 그리운 것은 그리움으로 남겨두자. 그리고 슬퍼하자. 그리고 그리워하자. 어떤 철학자가 이야기한 몸각(覺)을 총 동원하여 그리워하자.

장이모 감독의 ‘붉은 수수밭’에 흘러넘치던 고량주의 향기처럼 강하고 싸한 그 그리움을 놓지 말자.

천변만화의 무심이 있다면 이 공허가 메워질까? 아니 정말 이 그리움의 끝에는 내 아이가 있는 게 맞는 것일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다른 슬픔이 문을 여는,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몸을 기대 마음의 무덤에 벌초를 하러 간다. 진설할 음식도 없이 맨 술 옆에 차고 마음의 무덤으로 향한다. 만개한 꽃도 없고, 개망초의 시름만 있는 곳. 그게 지금의 내 마음이다.

진리가 가는 곳이 천국이라며?

그런데 ‘나’가 문제다. 천국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육의 나, 어서 어서 장사지내고 싶은데 이렇게 그 ‘나’가 집요하다.

아들을 보내며 또 다시 진리의 한 귀퉁이를 깨닫다.

제발 울어라 비루한 인생들이여... 너희의 처지가 어떠한 상태인지 제발 똑바로 보아라...

살려서 죽이고 죽여서 살리는 하늘의 오묘를 깨닫고 그 교만의 동산에서 이제 내려오라.

운다. 그리워한다. 아프다. 고단하다. 외롭다. 힘들다. 이게 왜 약한 것이며 왜 나쁜 것이겠는가? 

그 속에서 자유의 끈을 붙들다.

Atach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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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 속에서 예수 안의 '나'를 본 적이 있는가? 그 하나로서의 '나'

그리고 그 하나에서 떨어져 나와 역사 속에 덩그러니 던져져 있는 '나'

그걸 이별이라 하나?


엄밀히 말하면 이건 이별이 아니다. 원래부터 하나였던 관계에서 단순히 물리적 거리가 멀어졌다고해서 이별이라 말할 순 없지 않는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별리가 고통스러운 건 관계의 완전한 끊어짐에서나 타당한 것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 주체의 힘을 잃지 않았고 관계의 존속은 그래서 가능하다. 그러니 지금은 고통을 말할 때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건 이별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으로 감지되는 것들은 느낌이라는 인간의 그릇된 자기인식에서다. '참'이 될 수 없는 감정은 그래서 거짓된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고통으로 아픔으로 상실로 경험되어질 뿐이다.


그런데 고통은 실제적으로 내게 느껴지기도 한다. 찰나같이 주어진 지극한 사랑의 시간들은 지나가고 긴 이별이 앞에 놓였다. 상황적 분리는 계속해서 고통을 감지하라고 내게 지시한다. 실제로 그 통증은 수시로 나를 잠식한다. 헤어나지 못하고 아파하고 불안해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육의 감각과는 무관한 무엇이 점점 선명하게 자각된다. 생명력을 잃지 않는 사랑의 열심이 만들어내는 믿음이다. 심기워져 내 안에 살고 있는 이 이중성은 삶의 전반에 깔려있다. 사랑과 이별과 생명과 연합은 한데 섞여 나라는 인간의 실존을 매일 바라보게 한다. 그저 그렇게 보이다 사라지는 것이 아닐 텐데...무얼을 알고 배우라는 건가?


사랑을 아는가? 사랑이 자라나고 깊어진다는 것은 함께하는 시간의 공유로 측정되는 것 아니다. '그가 거기 있는 것을 아는 것'이 내게 있어 사랑이다. 안다는 것은 관계성이다. 신적 연합에서만 가능한 일이지만 우리가 체감하는 인간의 사랑에서도 더러 허락되어 배워지는 감정이다. 인생을 시간 안에 가두시고 배우라고 주신 것 중 하나다. 두 손 마주 잡고 나 너 좋아 너 나 좋아 소꿉놀이는 소멸되어질 인간의 한계를 증명하는 것일 뿐이다. 사실 전심으로 나는 그런 것을 원하고 있다. 그 절절함의 감정에 어떤 헛됨이 있을 수 있다 여기겠는가? 하지만 절실할 수록 더 다가오는 또 다른 간섭의 손길은 내가 느끼고 원하는 감정이라는 것들의 실체를 발겨 내신다. 정말 내가 감지하는 이 모든 것들이 참이기도 하고 거짓이기도 한 건가? 고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참 고통은 참 사랑의 깨어짐에서나 허락되는 감정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토해낸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의 외침이 바로 그 자리에서 나온 것이다. 완전했던 연합이 죄의 속량을 위해 완전한 헤어짐을 먼저 낳는다. 하늘과 땅의 거리로, 성육신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지만 그건 이별의 모습이 아니었다. 인간의 측은지심이 하늘에까지 닿아 神을 위로하려 들었을 뿐 성자는 성부와의 연합이 깨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공의는 역사 속 예수의 모습에서 순종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시간이라는 한시적 안목 속에서 떨어짐의 모습으로 보여질 뿐 연합의 관계에서만 가능한 화평이요 청결이었다. 그런데 그 관계가 깨어진 단 한 순간이 십자가 위에서 일어났다. 거기에만 참 고통이 존재한다. 그러니 섣부르게 아픔을 고통을 말하지 말자.


그리고 부활로 인한 연합이 선포된다. 살아남이다. 극심한 통증을 딛고 생명이 탄생되는 자리다. 여자가 죽고 아이가 탄생하는 자리다. 십자가로 완성되는 구원의 현장이다. 그 자리에 불립받은 우리는 이제 원래 하나였던 관계의 기억을 끌어낼 수 있다. 신부에게 부케가 주어진 것이다. 결혼식장에서 많은 어여쁜 자들 중에 부케를 들고 있는 자가 신부다. 신랑의 빙폐물인 믿음이 우리에겐 부케다. 하지만 신부된 우리는 지금 신랑과 가시적으론 이별의 상태다. 그 신랑이 지금 어디 있는가? 난 어디를 바라보며 살고 있는가? 정말 그 기억만으로 이별로 감지되는 지금의 상황에서 내 육이 자꾸 요구하는 별리의 아픔을 밀어낼 수 있는가?


신랑의 입맞춤은 달콤했고 구원의 감격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 그 순간의 기억이 영원을 보장한다. 그렇게 내 안에 믿음으로 생명으로 들어와 있는 예수는 2000년 전 십자가가 꽃히던 그 시간에 역사적 사건으로 이루어졌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이전, 시간의 개념도 없던 묵시 속에서 이미 완성된 자로 존재했었다. 원래도 거기였던 내 자리가 이젠 정말 선명하게 자각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으로 치면 이보다 더한 역사가 어디 있으며 그 본질적 깊음과 완전함이 이보다 완벽할 수 있는가? 그런데 우린 지금 외롭다. 신랑과의 완전한 연합이 이루어져 있지 않아서다. 이 역사 속에서 배우고 오라는 것이 있다 했다.


신기한 건 이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날마다 생겨나는 믿음과 사랑을 느끼는 것이다. 함께 할 때 느끼지 못했던 신뢰와 사랑이 이별의 모습에서 더욱 선명히 발견된다. 아니 함께할 떈 전심이 그 속에 묻혀 객관적인 감정으로 바라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떨어짐의 사건으로 그 실체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뿐이다. 역사 속으로 던져진 성도의 운명에서 체험되는 단 한가지 믿음으로 인함이다. 믿음이 주체이고 또한 객체가 되어 나를 장악하고 나에게 보이고 그러는 것이다. 그것을 배우기 위해 살아야야하는 인생에서 한시적으로 보여지는 모습들이라면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위로가 된다. 그래서 살 수 있다. 믿음이 이기는 것이다. 그러니 이건 이별이 아니다. 우린 연합의 상태고 이미 완전하다. 그 사랑만이 참 이다. 내가 지금 슬프지 않고 기다리며 바랄 수 있는 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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